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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선생은 유년기 고향집에서 자연스럽게 정가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운산면 거성리가 고향이다.
당시 유 선생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당대의 명창들이 유 선생의 집에서 묵어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 귀동냥으로 정가를 접하였다고 한다. 8.15해방 후에 향교가 활성화 되었고 지금은 당진군
에 속했지만 당시에는 정미면과 대호지면이 해미향교의 관할에 있었다고 한다. 걸어서 해미향
교에 다니던 사람들이 오가며 묵어가는 중간거점이 유 선생의 집이었다고 한다. 손님들은 밤새
시조를 읊조리고 유 선생은 잔심부름을 하면서 시조를 들었는데 어린마음에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이
꼭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 선생이 젊었을 때는 해방 후 살기 어려운 시기
였고 산업화와 더불어 우리소리가 대접받지 못하고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다. 마음속에만 묻어 두
었던 소리를 다시 접하게 된 것은 그가 60세가 다되어 부활한 전주대사습놀이였다. 1995년에 전
주대사습놀이에 출전하여 장원을 차지한 유 선생은 그 뒤부터 오로지 한우물을 파며 미친 듯이
정가에 빠져 들었다. 국립국악원 이양교 선생과 경북대학교 김경배 교수 등과 같이 공부하며 매
달린 결과 오늘날 가곡이수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아마 98년도일 겁니다. 중국 연변에 공연을 하러갔는데 연변방송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
습니다. 연변에서 잊혀져가는 우리소리를 들으러 동포들이 모여들었어요. 온힘을 다해 가곡을
불렀는데 우리장단에 맞춰 흥겨워하던 동포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아! 우리 소리는
우리 민족의 가슴속으로 영원히 흐르는 핏줄 같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우리 것의 소중함을 크게 느끼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77세의 고령
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하게 솔선수범하며 우리소리 전승에 앞장서고 있다.
유 선생은 우리 소리가 양악에 밀려 소외되고 관이나 정부에서도 지원책이 미흡한것 같아 늘
아쉬움이 많다고 한다.
“앞으로 젊은 사람들이 우리소리의 맥을 이어받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육계, 정부, 지자체
에서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 선생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지키고 우리 것을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지 못한다면
어떻게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고집스럽게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조상의 숨결이 이어
지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국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정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보면 계속 이어오던 맥이 우리 대에서 끊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유 선생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정가에 미쳐 오늘도 그는 우리소리에 푹 빠져 있다. 가곡을 느끼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회원들을 위해 유 선생은 서너 평 남짓한 시우회관으로 매일 출근한다. 비록 일제시대에 지어진
낡은 건물이지만 그곳에 가면 행복하다고 한다. 그가 더 신명나는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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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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