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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일제 강점
작업은 별도로 이어지는 형태로 이어
기 후기에는 한국인들이 금맥을 찾아
졌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후에도 이
내 채굴을 시작하고 땅이 아니라 굴에
러한 형태로 유지되었다. 지금도 노다
따라 매매가 이루어지는 정도에 이르
지 구덩이로 불리는 하나의 금광은 맷
렀다.
돌만한 노다지가 나온 것으로 유명하
일제는 철저히 금을 착취해 간 것으
고 1960년대 말까지는 노다지를 캤다
로 보인다. 처음에는 산에서만 캐던 금
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으나 점
광이 급기야는 남산에서 흘러내려 논
점 생산되는 금의 양이 감소하였다.
산천으로 흘러가는 냇물에서 사금을
마지막으로는 고석진이라는 인물이
캤는데 사금을 캐는 대형선박(大船舶)
순덕 광산을 인수하여 가재티골의 금
을 만들어 운영하는 별도의 기업이 생
광을 중심으로 1988년까지 금광을 운
겼는데 이 역시 모두 일본인들이 운영
영하였으나 채산성이 떨어져 폐업하면
하였다.
서 금광산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에는
된다.
금광굴이 100여개에 이를 만큼 성행하
88년 폐업 당시 광산 근로자가 모두
면서 남산골은 도시를 방불케 할 만큼
30명에 이르렀다 하니 그 규모가 작지
주민들이 늘어났다. 지금은 2~3 세대
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광산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 홍성골에
의 굴은 무너져 출입을 할 수 있는 굴
30여 호 이상의 주민들이 거주한 것도
이 없으며 건물에는 잡초와 잡목만 무
금광의 영향이었다.
성한 지경이다.
건평은 부여 건평이나 공주 건평을
막론하고 식당과 술집이 들어서 주막
<다음호에 계속>
거리를 형성하였고 당시에는 한 집에
한 대도 가지기 힘들었던 자전거를 한
집에 두 대를 가지고 있어서 논산사람
들이 부러워했으며 술집에는 몸을 파
는 여인들이 대여섯 명씩 있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금광은 소규모의
사업으로 난립하여 굴 단위 사업주가
채굴을 하고 이를 갈아 금을 정선하는
公州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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