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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도 굴을 따러 들어갔는데, 2살 먹은 동생이 젖을 먹지 못해 울었던 모습이 선연하다고

남,
증언하였다.


광암마을주민들이생존할수있었던것은배를뭍에걸어놓았기때문이었다.관당리주


민처럼배를바다에띄워놓았으면배를타고오다가사고가났을텐데,배를뭍에걸려놓


아 들어올 수가 없었다. 광암마을로 들어오려면 물이 많이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황지기


섬에서도 높은 곳에 걸어 놓았었다. 그래서 바람이 불어도 배를 탈 수 없었고, 사고를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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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수있었다.
황교리의굴양식은과녀쭉뿌리와소의섬에서하였다.
황교리 바다는 모래와 갯벌로 되어있어 굴양식을 할 수 없었다. 다만 과녀쭉뿌리의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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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기는 유일하게 바위가 있어 굴양식을 할 수 있었다. 민물이 들어오는 곳이라 굴의 품질
이좋았다.그리고주산땅소의섬에서도광암주민들이김양식을하였다.소의섬이광암
사는황씨네들섬이라황씨네가들어가살면서굴양식을하였다.
부사호에는한때재첩이많이나왔다.
부사호에는한때재첩이많이나왔는데외지사람들이와서잡아팔았다.요즘에는잡
는사람이없는데,호수가오래되어뻘이퇴적되었기때문에없는것으로알고있다.당국
에서도위험하여잡지못하게하고있다.과거대량으로나올때도근처에사는장안마을
주민들이잡지는않았다.
장안마을주민들은자체적으로버스를운영하였다.
황교리 광암마을에서 공군사격장 때문에 이주해간 장안마을에서는, 초창기 교통문제
가 심각하였다. 버스가 들어오지도 않았고,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민
들은 서천군청에 찾아가 서면에서 장안마을을 통과하여 보령까지 버스노선을 만들어 달
라고 민원을 넣었으나 거절되기도 하였다. 할 수 없이 마을 자체적으로 봉고차를 구입하
고운전사를고용하여웅천까지하루에5번정도운행하였다.이렇게한5년을운영한뒤
에보령시내버스가장안마을까지들어왔다.당시이장이황두철님이었는데이런사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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