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928페이지

320페이지 본문시작

황교리전체가하나의상여를사용하였다.

남,
황교리마을에는하나의상여가있었다.상엿집은광암마을앞산너머에있었는데,이

주하면서부주굴제방으로옮겨놓았다.상엿집이현재도있다.





광암마을에서는대부분의가정이정월에안택하였다.


광암마을에는교회가없었고,19670~1970년대까지대부분가정에서정월에안택을하

5
였고환자가있으면경을읽었다.마을에는무당이없었고,주로남포소뱅이에서철행씨
라고하는남자무당이와서안택하였다.대개저녁에시작하여새벽까지읽고아침에떠
났다.
320
광암주민들이종달산에가서기우제를지내다가사건에휘말렸다.
광암주민들은산신제는지내지않았지만기우제를지냈다.기우제를지낸곳은종달산
꼭대기였다. 어느 해 날이 몹시 가물어 종달산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종달산 꼭대기
의구덩이에강릉최씨집안에서묘를써놓았다.이에광암주민들은종달산꼭대기의웅
덩이에묘를만들었기때문이라고여겨,호미로파는시늉을하였는데,이것이고발되어경
찰서에끌려가는고초를겪었다.
당시 기우제는 주로 여자들이 지냈고, 떡시루를 가져다가 제를 올리고 불을 피웠었다.
주로여자들이지냈으나황춘연님은어린애라구경으로따라가보았다.키로물을까부르
는것을본기억은없다고한다.기우제를지낸뒤에실제로비가왔다고한다.
광암마을에서는배사업을하는사람들이팔월열나흗날과섣달그믐날용왕제를지냈다.
광암마을에서도용왕제를지냈는데,배사업을하는사람들이지냈다.1년에2번,팔월
열나흗날과 섣달 그믐날, 즉 명절 전날 지냈다. 떡을 한 시루 쪄 배에 올려놓고 절하는 것
이었다.
6.25당시광암뒷산에호를팠다.
6.25당시인민군치하에서광암뒷산에호를팠다.주로밤에팠는데,외지사람들을동

320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