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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박지계
朴知誡
<1573(선조 6년)~1635(인조13년)>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중종 때〈동몽선습(童蒙先習)〉
을 지은 세무(世茂)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군수 응립(應立)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사헌부 감찰 숙의 딸이다. 부인은 남인 계
열인 전주 이씨 유간(惟侃)의 딸이며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이 그의 처남이다. 자는 인지(仁之), 호
는 잠야(潛冶)이다. 아버지 임지인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학문에 전념하였고 10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더욱 엄격히 수행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친을 모시고 제천·괴산으로 피란했을 때 모친이 병환을 얻었다.
그는 간병에 온 힘을 쏟아 눈썹이 다 빠졌고 위독할 때 피를 내어 드렸으다. 그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
하였으며 모친이 별세하자 추렴해서 장례를 모시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미 학덕으로 명성이 높아 1606년(선조 39)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8
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북인정권이 등장하자 아산 신창에 자리 잡고 살면서 포저 조익(趙翼) 등과
도학을 강론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좌세마(左洗馬) 겸 서연관(書筵官), 이어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추천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623년(인조 1)에 우의정 신흠(申欽)이 학행으로 추천하여 왕의 징소(徵召)로 사포(司圃)를 거쳐 지평으
로 제수되었으며 함께 천거된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왕과 면담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하였다. 1626년(인조 4) 이른바 원종추숭론(인조의 생부 정원군을 추존하고 종묘에 배향하자는 주장)
을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나 여론이 부정적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고 신창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
하였다. 뒤에 남인 허목 등에 의해 그가 학적(學籍)에서 삭제되자 그의 제자들이 모두 과거 응시를 거부하
기도 하였다. 이후 영월군수·청풍군수, 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1633년(인조 11) 동부승지(同副承
旨)에까지 올랐으며 1635년(인조 13)에 63세로 졸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위패를 문묘(文廟)에 모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조상우(趙相禹)·조익 등과 온양 정퇴서원(靜退書院) 건립을 주도하였다. 예론
(禮論)에도 조예가 깊어 예학의 종장으로 일컫는 김장생과 함께 논변했으며 제례·복제에 관한 논설을 많
이 저술했다. 저서로는《사서근사록의의(四書近思錄疑義)》
《주역건곤괘설(周易乾坤卦說)》
《잠야집》등
이 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현재의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에 있던 인산
서원(仁山書院)에 추배되었다.
[43] 방진
方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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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장인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평창군수를 지낸 홍지
의 손자이고 영동현감을 지낸 중규의 아들이다. 부인은 남양(南陽) 홍(洪)씨이다. 대대로 염치 백암리에
살았던 그는 활을 잘 쏘는 등 무예가 출중했으며 보성군수를 역임했다. 그의 외동딸이 어릴 때부터 총명
해서 그녀가 12세이던 어느 날 화적이 집에 쳐들어왔을 때 화살이 떨어지자 베틀에 쓰는 댓가지들을 마루
에 쏟아 적들이 화살이 많다고 여기고 돌아가도록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딸은 이순신이 21세 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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