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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군에 파급되었다 그리고 본도의 만세운동은 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과열하는 듯하다가는 곧 식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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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하순에 재연
再燃
되더니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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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터 월 일까지 그 절정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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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도에서는 기독교도와 천도교도가 만세운동을 주도한 몇 곳을 빼고는 거의가 농민들이 주동한 것 같
다 물론 학생이나 혹은 광산 노동자가 주체가 된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이 지방의 만세운동은 충
북의 그것과 비슷해서 자못 격렬한 것이었으나 반면에 밤중에 가까운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만세
를 부르는 등 다른 도보다는 특이한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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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은 충남지방에서 첫째로 손꼽히는 운동이
었다 천안군 동면
東面
에서는 기독교 전도사 조인원
趙仁元
을 주동으로 해서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그 준비를 서둘러 왔으며 이와는 달리 인근 면인 수신면
修身面
에서는 그 지
방에서 학식과 덕망으로 주민의 추앙을 받는 김상훈
金相勳
이 주동이 되어 밤바다 각 마을 근처의 산
봉에서 봉화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두 면의 주동자가 서로 연결되어 월 일 아우내 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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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합동으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밤 자정
子正
을 기해서 다음 날의 운동을 알
리는 봉화가 요소마다 올랐다.
약속된 날이 밝았다 천안군 일대 뿐만아니라 멀리 충북의 청주 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
한 운동자가 아우내 장터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날 오전 시경에는 벌써 천여 군중이 장터로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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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있었다 거사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큰 태극기가 긴 장대에 매달려지고 그 아래에서 독립선언
식이 열렸다 운동의 총지휘자 조인원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군중은 장터가 떠나갈 듯 대한독
립만세 를 불렀다 이어서 군중은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파견소쪽으로 행진해 갔다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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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의 이화여학교
梨花女學校
생도인 류관순
柳寬順
이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
누어주었다.
시위 군중은 평화적인 행진을 계속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앞서 가던 시위대 한 사람이 일본 헌
병의 칼에 찔려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군중은 술렁대기 시작하였고 시위대는 최초의 희
생자를 둘러메고 헌병 파견소롤 몰려갔다 시위 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
에 메어다 놓고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였고 일부 과격한 청년들은 파견소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기
도 하였으며 폭력으로 대항하기도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겁에 질려서 파견
소 안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얼마 뒤에는 지휘자 조인원의 만류와 설득으로 큰 충돌없이 차아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찰과 헌병은 갑자기 발포하기 시작해서 그 첫 탄환에 조인원이 쓰러졌다 일본 헌병
의 계속되는 발포로 군중은 일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쯤 지나서 군중은 다시 몰려들기 시작
했고 또 다시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다 그런데 오후 시가 지나면서 뜻밖에도 천안에 본부를 두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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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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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트럭을 타고 출동했다 그들은 트럭에서 내리자 마자 시위 군중을 향해서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군중은 다시 흩어져 달아났지만 일본 헌병대는 달아나는 군중을 추격하면서 그 등
뒤에다 마구 발포하였고 혹은 칼로 찔러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장터는 칼과 총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시체와 중상자가 즐비하게 널려졌다 이 때에 피살된 사람은 류관순의 부모를 비롯해서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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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나
되었고 그밖에도 중상자가 많았다 그런데 중상자 중에서도 그 뒤에 여러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한편 일경과 헌병은 달아나는 군중을 뒤쫓으면서 주동자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주
동 인물은 그들에게 검거되어 모진 고문과 곤욕을 받았으며 조인원과 류관순 등 수십 명이 재판을 받
고서 징역을 살았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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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소녀 류관순은 옥중에서도 끝까지 항거하다가 마침내는 참혹한 죽음
을 당하고 말았다.
이 밖에도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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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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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두 차례에 걸친 천안군 입장
笠場
의 만세운동은 각각 양대 여숙
良垈 女
의 여학생과 직산 금광
稷山 金鑛
의 광부가 중심이 되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월 일 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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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대호지면 조금리와 정미면 천의
天宜
에서는 이인정
李寅正
송재만
宋在萬
남주원
南柱元
을 비롯
한 대호지 면민중심 약
1,000
여명의 시위대가 정미면 면사무소로 행진해 가서 면장으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는 한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해서 전부 파괴하였다 이 충돌로 당시의 일경 명 중 명이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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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 박상건
唐津文化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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