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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암마을주민들은공군사격장때문에이주하였고,농사는그대로짓고있다.

남,
광암마을은공군사격장에2차로편입되었다.1차로편입된곳은소황리지역이었고,광

암마을은한3년후에2차로편입되었다.1차로편입된지역주민들은정부에서당진으로



집단이주시켰으나,광암마을주민들은보상만해주었을뿐이주는신경써주지않았다.


스스로이주할수밖에없었다.


당시 공군에서는 이주만 하고 농지는 그대로 경작해도 된다고 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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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자를뽑아전남영광에있던옛사격장에가보았다.주민들이이주한뒤에도토지를
경작할수있는것이사실이었다.그래서이주를받아들이고지금까지보상받은토지를경
작하고 있다. 그러나 공군에서 울타리를 친 곳은 들어갈 수 없어 경작할 수 없다. 경작권
이없어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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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암마을주민들은함께장안마을로이주하였다.
광암마을주민들은22가구가함께모여이주하였다.이주할장소를물색하다가장래를
생각하여바닷가로가기로하였고,부사지구간척지제방옆에있는장안마을로가기로하
였는데 한양대학교 땅이었다. 당시 한양대학교 땅을 관리하던 사람은 무창포에 사는 임
흥빈 씨여서 대화하였으나 진척되지 않아, 당시 시의원이었던 백일기 씨가 직접 한양대학
교를방문하여해결하였다.
한양대학교로부터땅을구입하여택지를조성하고분배하였는데1가구당80평씩분배
하였다. 당시 이장은 황두철 씨였고 고생이 많았다. 80평을 대지로하여 보상금과 주택자
금5000만원씩을대출받아좋은집을지었다.당시이주한22가구중장수황씨가20가구,
타성은2가구뿐이었다.이곳에서20년을거주한후다시이주하였다.
장안마을에서는해수욕장을열었다.
장안마을은 소황사구 옆이어서 모래장벌이 좋아 여름이면 해수욕객이 모여들었다. 첫
해에는 그냥 지났으나 다음 해부터는 마을에서 시설을 하고 자릿세를 받기로 하였다. 마
을의 부녀회가 나서 그늘막을 만들어 자릿세를 받고, 음료수 등을 팔아 돈을 벌었다. 1년
이면1천만원정도의수입을올렸다.짭짤한수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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