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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 복원되어 운영되었으나, 예산 읍내 일부 마을에서는 두레가 소생하지 못하여 소
멸되었고 일부 두레들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통합되어 두레의 수가 줄어들었다.
예산의 두레가 결정적으로 줄어든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마
을은 많은 장정들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어 그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두레를
포기하였으며, 몇몇 마을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면서 두레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서 사라졌다. 자세한 원인은 좀 더 자세한 조사를 통해 밝혀야하지만 예산에서는 인
근의 다른 고장보다 두레가 일찍 소멸 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살피면 예산 인
근의 공주, 보령, 홍성, 아산 등지에서는 여름 논매기 공동작업의 두레 활동이 논의
잡초제거로 일반화 되는 1980년대 초반인데 반해 예산에서는 지금까지 조사한 10개
두레의 경우 모두 1970년대 이전에 여름 논매기 공동작업을 포기한 것으로 나타난다.
예산에서 가장 최근까지 여름 논매기 공동작업을 한 마을은 덕산면 옥계리 두레가
1967년까지 행했고, 봉산면 봉림리 두레의 경우에는 1954년 한국전쟁 직후 소멸되었
다한다. 물론 봄철 단오 이전에 이른바 ‘꽁댕이 먹는 날’이라는 봄두레 먹는 날의 관
습은 이양기의 보급이 왕성해진 198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날 두레 좌상은
모내기 날짜와 당해 마을의 품삯을 정했으나 이 또한 이양기의 보급으로 완전히 소멸
되었다.
두레의 가장 큰 공동작업은 논매기다. 일반적으로 논을 매는 작업은 전국적으로 3
회가 평균이며 이를 예산 및 충청남도 지역에서는 아시, 두물, 만물로 칭하는데 두레
는 이 공동작업 중 몇 번을 공동체가 주관하느냐에 따라 두레의 구성과 운영의 성격
을 좌우한다.
3회 모두 공동작업으로 행하는 두레는 장정들의 일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좀 더
많은 일을 행하려는 두레이며, 1회에 그치는 두레는 일보다는 두레 공동체가 함께 일
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함께 즐기는 것을 중요시 하는 두레들이다. 대부분 평야
지대의 두레는 3회 세물두레가 많고 산골 두레는 1회 한물 두레가 많은 것도 이런 이
유에서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 볼 때 예산의 두레들은 모두 마을 공동체의 상부상조
의 정신을 지켜내려는 두레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산군의 신안면 고도면 등 이
1장. 예산민요의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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