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80페이지

32페이지 본문시작

례로 거쳐 1643년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이어서 황해도관찰사 재직 중에 선정을 펴 칭송이 자자했다.
1647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고 천추사(千秋使)로 연경에 다녀온 뒤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
다. 이듬해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한성부 좌윤 겸 의금부총
관(義禁府摠管)이 되었다.
이때 대사간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의견을 말하자 왕이 차자의 비유가 사리에 맞지 않으니 고쳐서
바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차자를 고치라고 명하는 것은 왕의 잘못이므로 언론을 맡은 신하로서 어
찌 할 말도 아니하고 묵묵히 있을 수 있겠으며 임금의 잘못을 간한 내용은 고칠 수 없다’고 해서 왕의 비
위를 건드려 경주부윤으로 좌천당하였다. 인조가 승하(1649년)하자 그해 겨울에 부총관(副摠管)으로 기
용되었고 1650년(효종 1) 도승지에 이어 공조판서에 올라 지경연(知經筵)과 지춘추관사를 겸했다. 이듬해
진향부사(進香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지의금부사·우참찬·예조판서 등을 거쳐, 다시 병
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653년 병조판서로 병권 확립에 진력하다가 병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있던
중 갑자기 병세가 위독하여 5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왕은 매우 애통해 하며 해조(該曹-해당 관청)로 하
여금 관재(棺材)와 상장(喪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에 있고 신도비의 비문은 조석윤(趙錫胤)이 찬(撰)했다.
[40] 박유연
朴由淵
< ? ~ ? >
조선 후기 17세기의 학자·은사(隱士)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동부승지를 지낸 학자인 잠야(潛冶)
지계(知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인 계열로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의 아버지인 전주 이씨 유간
(惟侃)의 딸이다. 자는 약기(躍起)이고 호는 일재(逸齋)이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리 뛰어났다. 효종 때 특별
히 세마(洗馬)로 제수되고 이후 주부와 좌랑을 제수했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으며 다만 백의(白衣-평상복)
로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왕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경탄했다. 성리학 일변도로
만 흐르지 않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학문이 크고 넓었다. 의학에까지 밝아 1659년(효종 10)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 의해 궁중 의약(議藥)에 참여시키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으므
로 불허되었다. 졸(卒)한 뒤에 경연관의 요청으로 지평(持平-정5품)을 증직하였다.
[41] 박자오
朴子晤
< ? ~ ? >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439년(세종 21)에 양성현감으로 나아갔고 그 후 문과에
급제한 뒤 1445년(세종 27)에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후 공조정랑을 거쳐 감찰에 올랐으며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서 1455년(세조 1)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묘는 인주면 상도
(上道-은고개 일대) 선종암동(善鍾菴洞-관암리)에 있다.
31

32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