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4페이지

33페이지 본문시작

온양문화원
문화의 향기를 담아내는 소담옹기
[21] 효자 박뇌공 <朴雷公>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광대
조선 후기 숙종 때의 효자이다. 아산현 사람이며 재인(才人-광대)이었다. 자세한 내용
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그 아내와 함께 효자·효
부 정려가 내려졌으며 그 딸의 신역(身役)이 면제되었다.
[22] 열녀 박씨 <朴氏>
청나라 기병이 침입하자 물에 뛰어들어 죽다
조선 후기의 열녀이다. 신창현에 살던 황우해(黃禹
海)의 부인이다.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의 기병(騎
兵)이 별안간 들이닥쳐 핍박하므로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이때 그의 아들(황의길)도 그를 따라
함께 죽었다. 인조 때에 신창현 대동면 웅산리, 현재
의 아산시 득산동 득백이 마을에 정려를 세웠다는 기
록이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 열녀 박씨 정려 유허비
1878년(고종 15)에 신창현감 심명영(沈命永)이
세운‘고 황의길 모자 병정(?旌) 유허비’
가 있다. 병정이란 둘, 즉 어머니 박씨와 아들 황
의길의 정려가 함께 내려졌음을 말한다.
[23] 효자 박천주 <朴天籌>
대변 맛 보며 손가락 끊어 피를 약으로 바치다
조선 후기의 효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자는 운재(運哉) 호는 설계(雪溪)다. 효
성이 지극해서 부친의 병환에 대변의 맛을 보면서 손가락을 끊어 피를 약으로 바쳤다. 부
친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면서 시묘하였고 3년 동안을 한결같이 아침저녁으로 호곡하였
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전례대로 행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묘소를 시묘동(侍墓洞)이
라고 일컬었다.
31

33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