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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보면서 “이곳에는 잉어가 있을 텐데
기간이 일제 강점기다. 그리고 전쟁의
잡을 수 없구나.”하고 한탄하였다. 그
어지러움과 가뭄의 흉년(凶年)이 겹쳐
런데 갑자기 방죽의 어름이 깨지면서
하루하루 목숨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잉어 한 마리가 어름 위로 튀어 올라
고통의 연속이었던 것이 한국전쟁의
와 그 잉어를 잡아다가 부모를 봉양하
참혹함이었다.
였다.
그런데 남산골에서는 이 기간 동안
이러한 소문이 멀리 퍼져 박씨는 나
다른 고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
랏님으로부터 효자로 상을 타고 그 증
가 넘쳤으니 그것이 금광 때문이다. 남
표로 정려를 세워 마을 사람들은 이곳
산리 금광의 정확한 시작의 기점은 알
을 ‘효자문거리’
로 불렀다 하는데 지
수 없다.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이 일본
금은 정려가 전하지 않는다.
인들이었고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극비로 붙인 상황에서 조사를 하고는
남산골 금광
땅을 사들인 후 갑자기 금광 회사를
설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민족에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인 사장이 금
기간은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징용을
광을 운영하였는데 사장의 얼굴을 본
끌려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것은 차치
사람조차 거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하고 일제의 침탈로 인하여 경제가 피
사장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폐해지면서 자식의 끼니를 걱정해야
실정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살펴볼 때
하는 부모가 아픈 가슴을 안고 살아간
1800년대 말 조선 정부의 사주를 받아
산 속에 방치된 금광의 시설물들-(좌) 분쇄공장, (우) 사무실 건물
公州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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