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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 곤자가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시기는 1784년 말이나 1785년 초였다. 그때부터 이존
웠다. 이존창이 살고 있던 홍산과 그의 처가인 한산은 이웃한 마을이었다. 그리고 이존창과
창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같은 예산 출신인 홍낙민은 정약용과 사돈지간으로 이미 가성직단 신부의 일원이었으며, 그
이존창은 1776년 이래 떠나 있던 고향 예산 여사울로 돌아왔다. 1785년 초의 일이었다.
의 입교는 이존창과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지평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권일신이, 지방
에 이르러 천주교 신자로는 보기 드물게 고관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순조실록
으로의 천주교 확산을 위해 이존창에게 내포 지역을 비롯한 충청도 전교의 사명을 부여하였
원년 2월 경기감사 이익운의 소(「李益運?」)에는 “홍낙민자재호서 친숙존창지설 전파원
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재능과 인격을 바탕으로 상민과 천민
이”(洪樂敏自在湖西 親熟存昌之說 傳播遠邇)라고 하여 홍낙민이 호서에서 이존창의 말
뿐만 아니라 양반과 중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전도 활동을 벌였다. 그에게 붙여진 ‘내포
을 따랐고 또 널리 전도했음을 알 수 있다. 동향이자 먼 인척 관계로 비슷한 시기에 호서의
의 사도’라는 별칭답게 예산을 비롯한 충청도 중서부 일대를 누비면서 전도하였다. 중인 역
전도 책임자로 활동했던 두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관 출신으로 ‘교중제일인’(敎中第一人)이라는 평을 들었던 최창현은 후에 그의 추국(推鞫)
이존창은 중인 최필제에게도 전도했다. 그는 1790년 이존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가
에서 이존창을 권일신ㆍ정약종과 더불어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당시 천주교 내
1791년 신해년에 배교하였지만, 곧 신앙생활을 재개했다. 그 후 그를 천주교에서 떼어내기
에서 이존창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는 이존창에 대한 전부의 판단(湖中의 邪魁-정
위한 그 아버지의 집요한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고, 그는 1801년 사촌 최필공과 함께 투옥
조ㆍ순조실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의 활발한 전도 활동은 충청도 북쪽 끝인 아산만에서
되었다가, 먼저 참수(斬首)당한 최필공의 장례를 치르고는 다시 옥에 돌아와 역시 참수되었
남쪽 끝인 한산과 청양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활약
다.
은 일약 충청도를 천주교가 가장 융성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는 1786년부터 1788년까지
이존창의 중점 전도 대상은 상민 계층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먼저 이존창이 배교했다가
이른바 한국 천주교회의 임시 사제 조직인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신부로서 활동하다가
홍산으로 거처를 옮겨 비밀리에 전도활동을 하던 시기에 만난 황심, 예산 여사울의 면장 출
다시 평신도로 돌아왔다.
신으로 50세에 이존창을 만나 입교한 후 60세인 1801년 신유박해 때 모진 고문 끝에 처형
그가 전도한 인물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먼저 양반들 가운데 덕산 홍지영의 아들인 홍
당한 김광옥, 이존창이 1791년 이후 은거하던 홍산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공주의 고윤
필주와 그의 계모였던 강완숙이 있다. 특히 강완숙은 서얼 출신으로 후에 시어머니와 함께
득과 김홍철 일가, 이존창이 천안에서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전도한 최거두와 그 아들 천
서울로 이주하여 교회의 여회장의 직책을 맡으며, 주문모 신부를 6년간이나 헌신적으로 보
명ㆍ억명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최천명은 이존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운 뒤 서울
살핀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여신도가 되었다. 다음으로 이존창은 면천에 살고 있던
로 이주하여 활동하다가 1798~1799년의 ‘호서치사’(湖西治邪) 때에 청주 감영에 붙잡혔
49세의 양반 유권명을 전도하고 영세를 주었다. 유권명은 입교 후 자신의 종들을 모두 풀어
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 2년간의 ‘치사’(治邪)는 충청도의 천주교인들을 다스리기 위한 탄압
주었다고 한다. 또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의 입교도 이존창과 관련
으로서, 이때 청주감영에 잡혀 형을 받은 사람이 100여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충청도의 천
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존창은 김대건의 할머니 이씨의 삼촌으로, 그러니까 김대건은 이
주교 신자들이 그 이상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존창은 금정
존창의 조카딸의 손자가 된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김진후(1814년)를 비롯해 종조부인 김한
역졸 출신으로 천민이었던 김유산에게 전도하였다. 그는 이존창이 후에 전라도 고산으로 이
현(1816년), 그리고 아버지 김제준(1839년) 등이 3대에 걸쳐 순교하였다. 무장의 최여겸도
주한 후에도 같이 가서 이존창의 심부름을 맡아 했다. 그는 서울의 정약종과 전주 유항검의
이존창에게 배웠다. 그는 처가인 한산 부근에 천주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집을 왕래하면서 이존창의 편지를 전달했고, 또 두 차례나 중국에 들어가 북경의 주교에게
찾아가 천주교를 접한 다음, 천주교의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신해 진산사건 때 관에
조선천주교회의 밀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이존창의 전도 활동은 신분적으로는 양
잡혀 배교하고 홍산으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전도 활동을 하고 있던 이존창에게 천주교를 배
반층에서 천민층까지, 지역적으로는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남의 서북부 지역에서 남부
6.실학풍과여성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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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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