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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성호집』의 교정과 편집에도 역할을 하였고, 허전의 문
고 김정희는 1809년 호조참판으로 동지부사에 선임된 부친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집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이남규는 허전의 문인으로 동문이었던 이건창ㆍ김택영ㆍ황현 등
는 거기서 60일 동안 머물며 옹방강ㆍ완원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활짝 만
과 교유하였고, 그의 문하에 출입한 제자로는 신채호ㆍ이장식ㆍ강기선ㆍ변영만 등이 있다.
개한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익힐 수 있었다. 이후 김정희는 경학과 고증학과 금석학 연구로
특히 이남규는 이익의 예학에 대해 깊이 탐구하였다. 그런데 이익은 서민도 가례를 행할 수
학문의 방향을 정하고 그에 매진하였다. 또 연경의 학계와도 계속 교류하였다. 많은 양의 책
있도록 ‘서인가례’(庶人家禮)를 제정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발언을 하였다. 그는 예에서 우
과 탁본과 서화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열어놓은 길로 수많은 학자들이 뒤를 따랐다. 신
선 시의성을 강조하였고, 대중화와 간소함, 검소함을 중시하였다. 이익의 학맥에 속한 이남
위ㆍ권동인ㆍ김경연ㆍ김유근ㆍ조인영ㆍ조용진ㆍ이조묵ㆍ김명희 등은 김정희 못지않게
규는 당연히 이러한 이익의 예의식을 계승하였다. 1907년 8월 19일 일제가 100여 명의 군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였고, 연경에 갈 기회가 많은 역관 중 이상적ㆍ조수삼ㆍ오창렬ㆍ김
사를 몰고 그의 집에 들이 닥쳤다. 일제는 이남규에게 단발을 강요하고 협조하지 않으면 죽
석준ㆍ오경석 등이 제자가 되었다. 또 김정희는 서화계의 조희룡ㆍ허련ㆍ전기 같은 중인 출
인다고 겁박하였다. 준엄하게 호통치며 지조를 굽히지 않는 그에게 일제는 무자비한 만행을
신 서화가들에게 문인의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하여 예단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저질렀고, 이남규는 서울로 송환되던 중에 아들 충구와 함께 순국하였다. 예산 출신 이남규
조선 지식인 사회 한 쪽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 사조가 생
의 철저한 예학적 삶은 결국 살신성인의 순국정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겨났다.
북한산순수비는 1817년 김정희에 의해 새로 발견되었다. 당시 이 비석은 도선국사의 것
2)추사김정희의북학전통
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이 순수비의 한 글자 한 글자를 황초령비와 『삼국사기』의 기
록과 비교 검토하여 장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바로 김정희의 대표적 글인 「금석과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부친
안록」(金石過眼錄)이다. 총 7,000여 자의 이 글은, 글자의 판독, 문장의 해석, 서체의 탐구,
은 후에 판서를 지낸 김노경, 모친은 김제군수를 지낸 유준주의 딸 기계유씨이다. 김정희의
비석의 형태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문헌비고』 등 각종 문헌자료와 대조 검토하는 치밀함
집안은 조선 후기의 저명한 가문으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바로 그의 12촌 대고모이며,
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김정희는 통일신라 때의 무장사비(?藏寺碑) 파편을 수습했고, 진
정순왕후의 오빠로 호조참판을 지낸 김귀주와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는 김정희의 조부 김이
흥왕릉을 고증하기도 했다.
주와 같은 항렬의 10촌 형제들이다. 그리하여 경주김씨는 19세기 세도정치시기에 안동김
김정희는 이렇게 잊혀져가던 옛 비를 찾으며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씨, 풍양조씨, 남양홍씨 등과 함께 자웅을 겨루는 위치에 있었다. 김정희의 집안은 고조부인
그는 경학 자체에서도 고증학적 입장을 취했다. 그의 학문세계는 자신의 글인 「실사구시설」
김흥경의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면서 정순왕후 쪽과는 또 다른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
(實事求是說)로 요약된다. ‘실사구시’의 구호는 청나라 고증학을 연 고염무가 주창한 것인
고 그의 아들 즉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에
데, 그 연원은 『한서』(漢書)에 나오는 말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
봉해지면서 더욱 명문(名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때 영조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일
이다. 김정희는 바로 이 명제를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흔히 한나라의 유학은
대를 사전(賜田)으로 하사하고,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각 고을마다 한 칸씩 건립 비용을 분
훈고학이고, 송나라의 유학은 성리학이라 하여 그 정신과 방법이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담케 하여 53칸짜리 집을 짓게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추사고택이다.
사실은 그 둘이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한나라의 유학자들은 스승에게 아주 정밀하게
김정희가 박제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5세 무렵으로, 스승 박제가는 영민했
가르침을 받아서 그때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은 굳이 주석을 달 필요도 없었지만, 후대에
던 김정희에게 북학을 충실하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박제가는 이미 연경(지금 북
위, 진, 남북조, 수, 당을 거치면서 노자, 장자, 불가, 도가의 인식이 혼합되어 실사구시의 정
경)을 세 차례나 다녀온 바 있고 또 그 유명한 『북학의』(北學議)도 작성한 시점이었다. 그리
신이 혼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의 유학자들은 도학(道學)을 천명하며 성리
6.실학풍과여성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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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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