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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 정
한월당
한월당 김상정 열사는 서산지역을 대표하는 독립투사중 한명이다.
김상정은 강화도 사건이 일어난 해인 고종 12년(1875년) 9월 충남 예산
군 봉산면 마교리에서 출생했으며, 6.25 동란을 겪은 직후 1954년 8월
서산군 성연면 고남리에서 타계하였다. 본관은 경주, 자는 명옥(
호는 한월당(
)으로 이는 선대 한간 김한록과 월담 김일주의 호에서
취한 것이다.
김상정은 가학으로 한원진(
)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한원진(1682-
1751, 호; 南 , 자;
)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내 최대의 학술 논쟁어었던
호락논쟁의 중심에 서서 호학을 주창한 유학자이다. 한원진은 김한록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고 이들의 호론적인 학풍은 홍주문화권에서 김복한, 이설을 비롯하여 김상정 등 유생
들에게 전수되어 19세기 후반 적극적인 위정척사운동 내지는 항일민족운동을 일으키는 사상적 연원이
되었다. 김상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심히 빈곤하여 스승을 모시고 수학할 형편이 안되었지만
고조부인 김한록 학문을 계승하여 민족적 위기가 닥침에 따라 척이단의 이념을 실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망국민이 된 그는 철저한 의리론에 입각한 항일투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1919년 고종이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머리에는 폐양립을 쓰고 허리에는 삼띠를 매고 혼자
부석면에 있는 망등산에 올라가 의기를 꽂고 망곡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격문을 발표하여 일본의 고종
시해의 일을 성토하였다. 또한 무명지를 끊어 솟아나는 피로‘복수대의’
라 혈서하여 높은 대에 걸어
놓고 민족의 봉기를 촉구하는 혈서투쟁을 전개하였다. 100여장의 혈서를 쓰는 동안 피가 마르자 가슴
살을 칼로 베고 피를 내어 손가락에 피를 적셔 태극기를 만들어 다음날 산위에 기를 세우고 망곡의
예를 행하였다. 그가 혈서한 글은 모두 277자에 달한다.
군중집회에서 항일투쟁의 방법으로 납세거부 투쟁을 제시하면서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등 항일투쟁을
선도하여 서산지역에서 3?1운동을 봉기케 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왜경의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는 모두 다섯 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상복 차림의 그를 체포하여 강압적으로 회유하려 하였
으나 그는 손가락을 자르고 왼편 귀를 자르는 등의 저항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또한 그는 일제에 의해
단행된 담배 전매제도를 반대하여 농민의 생계를 보호하려는 투쟁도 전개하였으나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일전쟁 후에는 격문을 발표하여 일제의 총동원령과 창씨개명 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찾아가 친일매국노를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확립할 것을 건의
하였으며, 신탁통치를 반대하여 완전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김상정은 일제의 온갖 회유와 탄압에도 절대로 의리를 굽히지 않는 절의정신과 의연한
민족적 자존심을 몸소 보여주어 민족의 독립과 한국인의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데 일익을 다하
였다. 그의 유고는 아들 김홍제씨가 번역하여“한월빙설”
을 발간하였다. 올해 문화원에서는“한월
빙설”
을 증간하였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학문과 항일투쟁의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참고자료 : 김상기(충남대 교수)
“김상정의 학문과 항일투쟁”
32 |
2010_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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