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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상해에서는 김규식
金奎植
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하고 여운형
呂運亨
은 노령으로
장덕수
鮮德秀
는 일본으로 선우혁
鮮于赫
은 국내로 각각 파견하는 한편 서북간도와 미국 본토 그리고
하와이에도 서신을 보내어 국내외에서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국내로 파견된 선우혁
鮮于赫
은 양전백 이승훈
李昇薰
길선주
吉善宙
등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때
국내에서도 국내대로 민족독립을 요구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할 계획이 벌써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그 하나는 손병희
孫秉熙
권동진
權東鎭
오세창
吳世昌
최린
崔麟
등 천도교측과 송진우
宋鎭禹
현상윤
玄相允
김성수
金性洙
등이었고 또 하나는 연희전문의 김원벽
金元壁
보성전문의 강기덕
基德
주익
朱翼
경성의 한위건
韓偉健
세브란스의전의 이용설
李容
설 등 학생층이었다
이러한 국내 각계의 계획은 최린 송진우 현상윤 등에 의하여 일원화의 방향을 잡게되자 최린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은 먼저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를 선정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손병희
孫秉熙
외에 박영효
朴永孝
윤치호 한규설 윤용구 김윤식
金允植
등 구왕조 시대
의 중신들에게 교섭을 하였으나 거부당함으로써 실망에 빠지게 되어 한때는 독립선언계획이 무산될 위
기에까지 처하게 되었을 무렵에 월
1
21
일 고종황제가 승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총독부에서는 그 원인이 뇌일혈이라고 발표하였지만 항간에서는 왜놈들이 간신배를 시켜 독살
한 것이라는 풍문이 자자하게 퍼지자 민중의 배일감정은 절정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그 진상은 어찌 되었던 간에 이러한 때에 기어이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판단한 최린 송진
우 현상윤 최남선 등은 좌절 직전의 독립운동 계획을 다시 궤도에 올릴 방안을 의논한 결과 먼저 기독
교측과 합작하기로 하고 정주 오산학교의 교주 이승훈
李昇薰
과 접촉하여 함태영
咸台永
길선주
吉善
양전백 등과 합의가 이루어져 이 운동을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이 합작하여 거족적으로 일으키기
로 합의한 다음 이어 한용운
韓龍雲
백용성
白龍成
등이 불교대표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독립선언서의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토록 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대종교의 방대한 민중세력과 그리
3
고 중등 전문등 각급 학생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운동의 중추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이어 여기서 결정된 조선민족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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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은 월
2
28
일 밤 손병희
孫秉熙
집에서 모임을 가지고 결의를
새롭게 하는 동시 선언식의 장소와 절차 등을 마지막으로 결정하였다.
한편 정동 예배당에서는 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 대표들이 또 숭동 예배당에서는 각 전문학교 학생 대
표들이 모여 다음날의 동원 조직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선언서의 배포활동을 분담하게 되었다.
擧事日字
의 결정
거사 일자가 월 일로 결정된 사실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은 고종의 국장
3
1
國葬
이었다 고종의
국장일
國葬日
은 월 일로 이날 서울에는 전국 방방곡곡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 예상되
3
3
어 굳이 이 시기를 포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장일
國葬日
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불경
不敬
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이 날은 피하
기로 하였다 함태영의 제안에 의하여 월 일이 논의되었으나 만일 국장
3
4
國葬
당일에 폭동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독립운동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므로 국장
國葬
전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월 일이 가장
2
적합한 일자라고 생각되었으나 공교롭게도 월 일은 일요일이므로 기독교측에서 이 날의 선정
3
2
選定
반대하였다 따라서 하루 더 당기어 월 일이 거사일로서 만장일치로 합의되어 결정되었다
3
1
편저 박상건
唐津文化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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