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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자하동의 명칭을 써서 자하동(紫霞洞) 선인교(仙人橋)라 하며 고려에 대한 절의를 계속 지키고자 하
였다. 사후에 후학들이 그의 충절과 학덕을 기려 자하사(紫霞祠-또는 五峰祠오봉사)를 세워 배향해오다
가 1634년에 가까이에 정퇴서원(靜退書院)이 건립되자 그곳에 모셨다. 그러다가 1790년(정조 14)에 위차
문제가 발생하여 분쟁이 지속되었고 1837년(헌종 3)에 따로 금곡서원(金谷書院)을 세워서 배향하게 되었
다. 1867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자 1870년(고종 7)에 고택 옆에 세덕사(世德祠)를 마
련하고 아버지 유(裕), 아들 사성(思誠)과 함께 불천지위로 위패를 모셔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 그는 효자이기도 하여 부모상을 당하여 직접 흙을 져다가 봉분을 만들고 여막에서 3년 시묘를 하
니 흰 새가 날아와 머물렀다고 전해지며 이미 생정려(生旌閭-살아 있을 때 내린 정려)를 내려 서천 한산
에 정효비(旌孝碑)가 1392(공양왕 2)에 세워졌다. 조선 태조도 즉위 후 다시 생정려를 명하여 배방면 중리
에 정문이 세워져 효자비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효행은《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에 아들의
효행과 함께 수록되어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1417년(태종 17)부터 병환으로 고생하자 왕이 네 차례나 약을 하사하기도 하고 아들 사성이 자주
내려와 극진히 모셨으나 마침내 1423년(세종 5- 추정)에 88세로 하세하였다. 묘는 아산시 법곡동 건좌에
있는데 개성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흥양(興陽) 조(趙)씨를 이장했던 곳이다. 300여년이 지난 1750년
(영조 26, 경오) 9월에 영조가 온양온천에 행행하여 온천행궁에 머물 때 그를 기리면서 예관을 보내어 치
제(致祭)하고‘충효세업 청백가성(忠孝世業 淸白家聲)’
이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38] 민기수
閔祺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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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은일 처사(處士)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참봉 홍준(弘俊)의 아들이다. 포저(浦渚) 조익과
잠야(潛冶) 박지계에게 학문을 배우고 의리를 강마(講磨)하면서도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
다. 고을에서 그 행의(行誼)에 감복하였다.
[39] 박서
<1602(선조 35년) ∼ 1653(효종 4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온양 출신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장단부사 옹( )의 손자이고 정랑(正郞)
효남(孝男)의 둘째 아들이며 관찰사 추( )의 아우이다. 자는 상지(尙之)고 호는 현계(玄溪)다. 부친을 일
찍 여의고 형에게 글을 배워 열 살 때부터 시(詩)를 잘 썼으며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
(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3년 후 금화사별좌(禁火司別座)·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선공감주부(膳工
監主簿)·종묘사직장(宗廟寺直長) 등을 역임했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 을과(乙科) 2등에 급제하여
1632년 정언(正言)이 되었고 1634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홍문관부수찬
(弘文館副修撰)·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41년 수찬(修撰)이 된 뒤 집의(執義)·교리(校理)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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