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6페이지

5페이지 본문시작

324
이보현은 결혼할 뜻이 전연 없었지만 어머니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결혼하였지만 고행과 금욕
을 실천하며 수행생활(
)을 하기 위해 황심과 같이 충청도 연산 땅 산골로 이사하였다.
1795년 6월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주문모 신부는 연산 이보현의 집에서 수개월 숨어지냈다. 이보
현은 신앙지식이 깊어질 수록 수도자처럼 수행생활을 열심히 했다.
1797년 정사박해가 시작되자 두려워 하기는 커녕 가족과 신도들을 격려하며 신앙을 북돋아 주
는데 더욱 열중하였다. 이보현은 날마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신앙을 증거할 좋은 기
회를 놓치지 말도록 믿음을 데워 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박해가 닥칠 것을 예감하고 온 동네 사
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리며‘이것이 마지막 잔치’
라며 죽음을 준비하였다. 아니나다를까, 이틀 후
포졸들이 들이 닥쳐 체포되어 연산 관아로 끌려갔다.
연산 관장은 배교하고 신도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도록 으름장을 놓았지만, 배교는 고사
하고 만물의 대군대부( 君
)이신 천주께 관한 책을 감히 관장에게 내놓을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이보현은 충청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고향인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진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믿음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의 기원이 태
초에 사람을 만드신 천주님께 있는데 어찌 천주를 공경하지 않겠느냐며 관장을 훈계하였다.
해미관장은 충청감사에게 이보현을 어떻게 처리할지 묻자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고 했다. 이보현은 사형판결문을 읽고 기쁜 표정을 지으며 판결문에 서명하였다. 그 후 장
터로 끌려 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지만 숨이 끊기지 않자 망나니가 몸둥이로 불두덩을 짓이겨 죽
였다. 때는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 그의 나이 27세였다.
3) 김진후(金
, 비오, 1739~1814)
김진후는 충청도 면천 솔뫼(현재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김
진후는 성( )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이며,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안드레
아)의 아버지이며, 성(
) 김제준(이냐시오)의 조부이다.
김진후의 가문에서 맨 처음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큰 아들 종현(
)이다. 김종현은 이존
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형제들을 입교시켰지만 아버지 진후는 출세에 여념이 없
어 아들의 권유를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아들들의 끊임없는 권유받고는 미관말직이
나마 버리고 입교하여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5
http://seosan.cult21.or.kr

5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