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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끼어들어 민중들과 어우러져 살았다. 한국천주교 박해사(
)에서 충청도 출신 순교자
들이 다른 지방에 비해 그 수가 많은 것은 천주교 신앙이 대중사회에 널리 보급되었던 까닭이다.
조선통치자가 정책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한 것은 1801년(
年)부터이다. 그러나 충청도에서는
1791년 신해박해 후 1793년부터 순교자가 발생하였고, 1797년(
年)부터 1800년까지 일어난
박해 때 해미(
)에서는 천주교도 100여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순교자중 이름
을 밝힐 수 있는 것은 2명뿐이다. 그리고 해미지역 순교사 연구자는 1811년부터 1839년까지 8명,
박해가 가장 치열한 1866년부터 1868년까지는 179명 이상으로 파악하면서 405명까지 추정하고
있다.
한국천주교는 1984년 103위 성인을 모셨다. 이분들은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의 순교
자들이다. 이 박해 때는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천주교의 선교를 책임 맡아 관리
하였고, 순교자들 중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교회가 주관하여
시복시성운동을 추진하고, 파리외방선교회가 한국에 진출하기 이전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
성은 한국교회의 과제로 남겼다.
한국천주교회는 2001년부터 1791년~1838년, 즉 초기와 중기 박해 때 순교한 분들 중 시복시성
대상자 선정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선정 작업을 진행하던 과정에서 몇 교구의 요청으로 103위
순교자에서 누락된 1839년(기해년)과 1866년(병인년) 박해의 순교자를 포함시켰다. 그리하여
최종 선정된 125명에 대한 시복시성을 2009년 6월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125명중에 해미 순교자는
인언민(
, 마르티노, 1737~1800), 이보현(
, 프란치스코, 1773~1800), 김진후(金
, 바오로, 1739~1814) 등 3명이다.
시복시성(
)의 시복은 신앙의 모범을 보인 순교자를 공식적으로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복자(
: 준성인
)의 품위에 올리는 로마 교황의 선언 예식이며, 시성은 성인 품위에
올리는 교황의 선언 예식이다. 복자는 그 지역 천주교에서 공경을 받고, 성인은 전세계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공경한다. 복자는 한국교회에서 공경을 받지만 성인되면 세계교회로부터 공경을
받게 된다.
2. 순교자의 믿음 살이
그리스도교에서 순교자는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고, 지키려는 믿음 때문에 공권력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유가( 家)에서도 진리의 확신 때문에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공자는 논어(위령공 15. 8)에서“지사(
)나 덕망있는 사람은 자신들의 인( )이 손상될 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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