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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누린내가 나는 것은 못먹는 셈이었다. 오로지 간장과 밥만을 먹을 수 있었는데, 제를



지내기20일전부터그렇게먹었다고했다.그렇게제를지내는사람은당주이고당주는남

?

성이었다. 혼자서 제를 올릴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니고, 음식 준비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함


?
께했지만,동장영감이주축이되어준비했다.제를지내는당주는마을사람들이돌아가면

서 하는 게 상례였지만, 바다에 나가기 보다는 주로 농사일에 힘썼던 김영기 씨는 한 번도
당주역할을맡아본일은없다고한다.
사실 임경업 장군과 조기잡이는 관련된 여러 설화들이 전해지지만, 주로 연평도에 많다.
창리는 연평도까지 나가는 배들 덕에 그 이야기가 함께 전승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
다.임장군의모습을그려놓은그림이있었는데,이것은매우무섭고권위가있었다.지금은
도난당하고 비슷하게 그려 놓은 새 무신도를 올려놓았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위압감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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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않는다고한다.
조선후기 세곡선이 편하게 다니기 위해 원래 육지와 붙어있던 안면도에 운하를 놓아 바
닷길을 뚫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데, 김영기 씨는 이에 대한 전승된 기억
을 정확히 이야기했다. 그때, 땅이 잘려나가 피가 났다는 전설이 있고, 그 덕에 창리가 포구
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현대건물이 있는 원래 신랑당에는 호랑
이와 얼킨 전설이 하나 전한다. 호랑이가 그 신랑당에 밥 좀 하나 점지해달라고 빌었다. 즉
인간 하나 잡아먹게 해달라고 빈 셈이다. 하지만 임경업 장군이 매어 놓은 말이 호랑이를
냅다발로차버려서석바루라고불리는섬이생겼고,그렇게도망가던호랑이는그아래있
는 상당장승에 놀래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쪽에는 지금 남아있는 각시당이 있
어 꼼짝을 못했다고 한다. 즉 그렇게 어디로 도망갈 수 없어서 헤매다가 임경업 장군이 매
어놓은말에발길로채였다는것이다.이는주변의섬들에대한지명전설로볼수있는이야
기다.
창리 사람들은 행정구역상 서산에 속해있지만, 천수만 덕에 주로 부석면이나 신평리 쪽
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서산장에 가는 경우는 소를 사거나 팔 경우에만 다녔다고
했다. 방조제가 생긴 이후 가두리 양식장이 생겼지만, 그보다는 천천히 관광객이 늘면서 펜
션이나도시인들의낚시를위한작은배들이더많이생겼고,곳곳에낚시터도들어섰다.새
로생긴방조제는사람들의삶의동선을크게바꾸기도했다.예전에방조제가없던시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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