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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탁월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9경ㆍ사
게 된 환망(幻妄)의 남자인지 알지 못하고 문득 그를 보고 천주라 한다. 마침
서ㆍ23사에 정통했음은 물론 제자백가와 국학ㆍ서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가환
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일로 신화(神化)하여 구인(救人)할 수 있는 대안
의 정치 사상은 민본 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특히 중요 관직이 지연과 문벌에 국한되
(大案)이 되었다.”(『소미산방장』 「양학변」(洋學辨) 상편)라고 하여 천주교
어 있음을 비판하고 유능한 인재의 발굴을 주장하였다. 또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려 이용후생
를 비판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천주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利用厚生)의 재원을 확보하고 상품 화폐 경제의 활성화를 중요시하였다. 민족의 개체성에
데 집중하였다.
기초하여 근대적 영토관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방론을 펼친 점도 주목받을 만하다. 이가
(4)수당이남규
환은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용하면서, 서학을 곧 경세와 실용의 일환으로 연구하여 이를 실
천에 옮기려 하였다. 하지만 정조 사후 반대 세력은 그를 천주교 독신자(篤信者) 즉 ‘자작교
그리고 성호가학은 한산이씨 이남규(李南珪, 1855~1907)와 그의 제자
주’(自作敎主)로 몰아 옥에 가두었고, 그는 결국 단식으로 자진하여 옥사하였다.
들에 의해 근대의 예산 지역에 뿌리 내릴 수 있었다. 이남규의 고택이 있는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는 한산이씨가 정착한 이래 100여 가구가 대대로 거주
(3)이병휴-이삼환
하는 곳이고, 이남규는 10세를 이어온 종가의 종손이었다. 이남규의 선대가
이병휴는 성호의 조카이자 제자로서, 특히 성호의 경학을 계승ㆍ발전시킨 사람이다. 경
예산에 터를 잡은 것은 이산해(1539~1609)의 산소를 대술면 방산리에 쓰면
학이란 유교의 경전, 즉 13경을 다루는 학문이다. 주자의 성리학적인 관점을 절대시했던 당
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산이씨가 입향한 대술면과 여주이씨
시의 풍토에서 성호는 유교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성호의 경학을 이어
의 고덕면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또 이 두 가문은 이미 충청도에 입
받은 이가 바로 이병휴였다. 이병휴는 경학 중에서도 예학에 대한 논저가 가장 많았는데, 그
향하기 전부터 혼인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성호 이익의
의 예학은 성호의 미진한 점을 보완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또 성리학 연구에도 주력하여
부친 이하진의 종조부 이상홍(1559~1596)의 배위가 바로 이산해의 딸이었
유형원과 이익의 반열에 서서 이(理)와 기(氣)에 대한 변론을 전개하였다. 이병휴는 그 외에
고, 이하진의 증손부도 한산이씨 이명상의 딸이었다. 이것은 작은 사례에 불
도 문학ㆍ역법ㆍ역사ㆍ역학ㆍ산수 등에도 정통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는 이기양ㆍ권철신
과하다. 그리고 이 두 가문의 밀접한 관계는 예산에 들어온 이후에도 이어졌
등 인재들이 많았고, 아들 이삼환에게도 계승되었다.
다. 여주이씨 이삼환은 이남규의 종고조인 이도명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고,
이삼환은 12살 때 종조부 성호에 입문하여 성호의 손자 이구환과 함께 공부하였다. 성호
이어 이삼환이 이남규의 증조부 광교에게
가 사망하자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와 벼슬을 마다하고 오직 경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
손자의 관례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또 이
하였다. 35살에 상처하였으나 재혼하지 않고 80평생 학구열을 불태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
남규는 이가환의 현손 이종헌과 매우 가까
는 자신의 학문적 계통을 미수(眉?) 허목에 연결시켰다. 그는 허목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
운 사이였다. 그리고 이 두 가문의 우정은
를 ‘소미’(少眉)라 하였고, 저서 이름도 소미산방장(少眉山房藏)이라 하였다. 결국 이삼환
학문적 소통으로 이어져 성호가학이 확산
은 이황-정구-장현광-이익으로 이어지는 성호학파의 학맥을, 다시 이익-이병휴-이삼환으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로 계승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삼환은 스승 이익이 가지고 있던 서학에 대한 관점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남규는 이익→안
같이 천문ㆍ역법 등의 실학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면,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정복→황덕길→허전으로 이어지는 성호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호와〔如德亞〕는 촌부(村婦)가 낳아 기른 자로, 어떻
이남규선생고택
6.실학풍과여성문학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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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게 된 환망(幻妄)의 남자인지 알지 못하고 문득 그를 보고 천주라 한다. 마침
서ㆍ23사에 정통했음은 물론 제자백가와 국학ㆍ서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가환
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일로 신화(神化)하여 구인(救人)할 수 있는 대안
의 정치 사상은 민본 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특히 중요 관직이 지연과 문벌에 국한되
(大案)이 되었다.”(『소미산방장』 「양학변」(洋學辨) 상편)라고 하여 천주교
어 있음을 비판하고 유능한 인재의 발굴을 주장하였다. 또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려 이용후생
를 비판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천주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利用厚生)의 재원을 확보하고 상품 화폐 경제의 활성화를 중요시하였다. 민족의 개체성에
데 집중하였다.
기초하여 근대적 영토관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방론을 펼친 점도 주목받을 만하다. 이가
(4)수당이남규
환은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용하면서, 서학을 곧 경세와 실용의 일환으로 연구하여 이를 실
천에 옮기려 하였다. 하지만 정조 사후 반대 세력은 그를 천주교 독신자(篤信者) 즉 ‘자작교
그리고 성호가학은 한산이씨 이남규(李南珪, 1855~1907)와 그의 제자
주’(自作敎主)로 몰아 옥에 가두었고, 그는 결국 단식으로 자진하여 옥사하였다.
들에 의해 근대의 예산 지역에 뿌리 내릴 수 있었다. 이남규의 고택이 있는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는 한산이씨가 정착한 이래 100여 가구가 대대로 거주
(3)이병휴-이삼환
하는 곳이고, 이남규는 10세를 이어온 종가의 종손이었다. 이남규의 선대가
이병휴는 성호의 조카이자 제자로서, 특히 성호의 경학을 계승ㆍ발전시킨 사람이다. 경
예산에 터를 잡은 것은 이산해(1539~1609)의 산소를 대술면 방산리에 쓰면
학이란 유교의 경전, 즉 13경을 다루는 학문이다. 주자의 성리학적인 관점을 절대시했던 당
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산이씨가 입향한 대술면과 여주이씨
시의 풍토에서 성호는 유교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성호의 경학을 이어
의 고덕면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또 이 두 가문은 이미 충청도에 입
받은 이가 바로 이병휴였다. 이병휴는 경학 중에서도 예학에 대한 논저가 가장 많았는데, 그
향하기 전부터 혼인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성호 이익의
의 예학은 성호의 미진한 점을 보완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또 성리학 연구에도 주력하여
부친 이하진의 종조부 이상홍(1559~1596)의 배위가 바로 이산해의 딸이었
유형원과 이익의 반열에 서서 이(理)와 기(氣)에 대한 변론을 전개하였다. 이병휴는 그 외에
고, 이하진의 증손부도 한산이씨 이명상의 딸이었다. 이것은 작은 사례에 불
도 문학ㆍ역법ㆍ역사ㆍ역학ㆍ산수 등에도 정통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는 이기양ㆍ권철신
과하다. 그리고 이 두 가문의 밀접한 관계는 예산에 들어온 이후에도 이어졌
등 인재들이 많았고, 아들 이삼환에게도 계승되었다.
다. 여주이씨 이삼환은 이남규의 종고조인 이도명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고,
이삼환은 12살 때 종조부 성호에 입문하여 성호의 손자 이구환과 함께 공부하였다. 성호
이어 이삼환이 이남규의 증조부 광교에게
가 사망하자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와 벼슬을 마다하고 오직 경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
손자의 관례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또 이
하였다. 35살에 상처하였으나 재혼하지 않고 80평생 학구열을 불태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
남규는 이가환의 현손 이종헌과 매우 가까
는 자신의 학문적 계통을 미수(眉?) 허목에 연결시켰다. 그는 허목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
운 사이였다. 그리고 이 두 가문의 우정은
를 ‘소미’(少眉)라 하였고, 저서 이름도 소미산방장(少眉山房藏)이라 하였다. 결국 이삼환
학문적 소통으로 이어져 성호가학이 확산
은 이황-정구-장현광-이익으로 이어지는 성호학파의 학맥을, 다시 이익-이병휴-이삼환으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로 계승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삼환은 스승 이익이 가지고 있던 서학에 대한 관점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남규는 이익→안
같이 천문ㆍ역법 등의 실학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면,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정복→황덕길→허전으로 이어지는 성호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호와〔如德亞〕는 촌부(村婦)가 낳아 기른 자로, 어떻
이남규선생고택
6.실학풍과여성문학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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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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