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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큰 배는 아니고, 모터 혹은 엔진조차 없는 나룻배 형식의 고깃배들은 가지고 있어서 작


,
은배를타고가까운바다로만조금나가도며칠먹을고기잡는것은일도아니었다.

?


사실 방조제가 생긴 이후, 창리는 그래도 바다에 면해 있기에 타격이 그리 크게 보이지는

?

않았지만, 당암, 칠전, 봉락 사람들은 생계에 큰 위협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분명히


정부와 현대에 방조제 건설의 반대 의사 표시를 보였지만, 군사정권(박정희, 전두환) 아래에서
?


시위를 크게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몇몇 마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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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음식을해다나르며까지,서울현대사옥근처에서반대시위를벌였다고한다.
창리 역시 방조제 건설 이후, 천천히 먹고 살기가 나빠졌다. 원래 갯벌이 많은 곳도 아니
었고,바다에면해있기에어업에도큰타격이없는것처럼보였지만,수많은물고기들의산
란처였던 천수만이 막히고 나니, 고기가 줄어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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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방조제 성립 이후 연간 1만 2150톤에 이르던 어획량이 3년 후 4,750톤으로 62%나 감소
해서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고통은 매우 컸다. 근 4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천수만A지구의역간척사업의필요성,그리고이를통한갯벌복원에관한이야기가슬며시
등장하고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천수만 방조제로 인해 간척된 땅들에서 소금기가 쉽게 빠지지 않기 때
문이다. 전남 해안의 갯벌처럼 무른 것이 아니고 장화를 신고 그나마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던단단한갯벌을간척했기때문에간척된땅의크기가매우넓고,간척에큰힘을들이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소금기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실제로 창리쪽 부남호의 물은 농
업용수로 사용하기에 부적절하고, 현대 아산은 간척된 농토에서 더 이상 농사짓기를 포기
하고최근에는태양광사업으로돌아설기미도보이고있다고한다.
방조제와 간척 사업에도 포구로서의 위용을 아직 그대로 간직한 창리는 주변 포구에서
찾아볼수없는큰당을가지고있다.영신당이그것이다.임장군,즉임경업장군내외를모
시고 있는데, 그 연원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무학대사와 임경업 장군의 내기 이야기가 천수
만일대에전해지는데,김영기씨는세세한줄거리를기억하고있지는못했다.
영신당은각시당과신랑당으로나뉘는데,신랑당자리에는현대의건물이들어서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영신당은 소위 각시당이다. 창리 영신당은 정월 초사흗날 제를 지내는
데,당에올라가서제를지내는사람은비린것을먹지못하고,육고기도먹지못했다.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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