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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못하지만,현대아산에서일을다닌세월만20년이니,간척사업부터방조제완공까지그



처음과끝을다본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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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면은 예로부터 포구가 많았다. 물론 방조제로 갯물을 막기 전이다. 당암리, 칠전리,


?
봉락리등의포구가대표적이다.하지만창리만큼크지는않았다.창리에는중선배도있었

다.11척정도가창리를중심으로어업활동을했다고기억한다.주로새우를잡아새우젓을
만드는 곳에 팔았는데, 새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갈 일이 없었다고 한다. 소위 정주영공
법으로 널리 알려진 폐유조선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히는 공법에서 알 수 있듯 유속이 매우
빨라서 방조제 마무리 공사에도 애를 먹은 적이 있는 곳이 이 천수만이다. 방조제로 막기
전에도 유속은 그대로였으니, 그 물길을 잘 살펴 길목만 잘 막으면 새우잡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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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젓은 배에서 바로 담갔다고 한다. 새우를 잡아 올리면 바로 그 자리에서 염장을 했
다는거다.물론염장하지않고포구로가져오는경우도있었지만,조수간만의차가커서쉽
게배를움직일수없는때가있으니,냉장기술이크게발달하지않은예전에는배에서직접
염장하는것이새우젓의신선도를나름보장하는방법이었을성싶다.
창리에 11척 정도의 중선배가 있었고, 그 선주도 창리에 살았지만, 선원들 모두가 창리에
서 산 건 아니라고 한다. 고기잡이배 선원들은 창리는 물론이거니와 남당리, 안면도, 황도
사람들이많았는데,중선배를직접부리는선주들이많은곳,그리고중선배가많이정박했
던 곳은 창리와 황도라고 한다. 당암이나 칠전에는 배를 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중선배
선주는없었다고한다.
새우가항상잡히는것은아니기에,새우철이지나면먼바다로나가조업을했다.뒤뜨기
혹은 보리새우도 많이 잡았다. 뒤뜨기, 즉 보리새우는 젓갈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창리나
황도나 당시에는 큰 포구였기에, 사람들이 항상 북적거렸지만, 방조제가 생긴 이후 마을 사
람들의삶은별로나아진게없었다.당연히바다가호수가되었기때문이다.어업이흥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물살이 강했기 때문인데, 그 물살에 오리다리가 부러진 곳이 지금 방조
제 한 가운데 있는 옛 섬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새우 말고도 도미가 많았다고 하는데, 도
미는 주낙으로 많이 잡았다. 당연히 갯벌이 펼쳐져 있는 곳이기에 낙지, 꽃게, 대하 등도 많
았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 중 농사에만 전념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 배가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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