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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을 막아주던 소나무숲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데, 그 자리는 일제 강점기에 별장이


,
있던 곳이기도 하다. 방조제로 바닷물이 막히기 전에는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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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서울에서해수욕을하러관광객들이찾아오기도하던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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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리 포구는 어촌계가 조직되어 있을 정도로, 동시에 중선배 몇 척이 포구에 정박할 수


있을 만큼 나름의 크기를 자랑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는 창고가 있었는데, 서산의 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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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서나는쌀을이창고에모아두고,당시미곡항이었던군산으로옮기기위한용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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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한다.
사실사기리는풍족했다.지금도간척지덕에그리부족한삶을사는것은아니지만,예전
포구가 있었을 때에 비할 수는 없다. 바닷가 옆 넓은 농토에선 쌀을 얻고, 야트막한 둔덕에
선밭을일구면서,갯벌에나가면온갖해산물이널려있었을뿐더러,포구에있는중선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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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고깃배를타기만해도,먹고살걱정은전혀없었기때문이다.실제로방조제로막히기
전 천수만은 온갖 바닷고기들의 산란장이었기에, 매우 다양한 종류의 어족 자원을 보유하
고있었다.
사기리의 고깃배들은 사실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갈 필요도 크게 없었다. 조기 어장
으로 유명했던 저 멀리 연평도나 가까운 안면도조차 나갈 일이 없었다 한다. 그만큼 천수
만, 지금의 간월도의 어장의 어족 자원이 풍부했던 것이다. 당시 사기리 포구에는 지금 기준
으로나, 그 당시 기준으로나 그렇게 큰 배가 있지는 않았다. 작은 배로 만선을 이루고, 계속
포구로 들어와서 고기를 장에 내다 팔아도 생계유지에는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로 요즘 연안어업이 추구하는 바가 이런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천수만 방조제를 막은 역사
가과연옳은것인지회의적인생각이들기도한다.
그 당시 사기리 포구에 있던 제일 큰 배는 10톤 정도로 추정된다. 마을도 꽤 컸다. 140호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지금 사기리는 130호 정도 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각각의 집마
다사는사람의수가크게는1/5로줄었고,없어진바다덕에더이상물을생업의터전으로
삼지않는다는점이다.다른농촌혹은농어촌마을처럼사기리에서아기울음을들어본것
은20여년전이마지막이다.
사기리포구가번성하던시기에는새마을운동을통해정부의지원과마을사람들의합심
으로 150미터 정도의 선창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사기리 포구가 어업으로 흥청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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