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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뒤여서 스승의 심상(心喪) 3년을 스스로 모셨다.
둘째 아들 김수공은 천안 광덕면 신덕리로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셋째 아들 김수검(1549~?)은 휴대리에서 거주하다가 탕정면 동산리의 교동인씨 인충걸(印忠傑)의
맏딸과 혼인하면서 구루미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수검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중봉 조헌(趙憲)
과 더불어 강학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1592년) 조카 김계남(金繼男, 1555~?)과 함께 의병을 모아
조헌을 돕기 위해 금산으로 갔으나 이미 늦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뒤에 그런 공으로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김수검은 4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 희성은 아들 하나를 둔 뒤 대가 끊어졌고 넷째 희민은 일찍 세
상을 떴으나 둘째 희현(希賢)과 셋째 희철(希哲)의 후손들이 밧덕지(동산2리) 등 인근 지역에 집성촌
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희현의 큰아들 재건(在鍵)이 공주 정안으로 갔다가 나중에 후손 일부가 다시 탕정면 매곡2리 신
풍터로 들어왔고 둘째아들 재석(在錫)의 후손은 동산리 일대에, 셋째아들 재정(在鼎) 쪽은 동산리와
음봉면 덕지리 등지로 퍼졌다. 김희철의 후손들은 명암2리 장목이 일대에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탕
정면 명암리쪽으로도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29] 김해김씨 김합
|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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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문신이자 조선 초의 은일(隱逸)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54세로 김녕군파(경파) 아산 죽
동(竹洞-대동, 현재의 음봉면 동암리와 송촌리) 입향조다. 현재 음봉면 송촌리에 거주하는 후손 73
세(世) 김경태(金慶泰, 88세)씨의 19대조이다.
고조는 김주국(金柱國)이고 증조는 김녕군파의 파조 김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이다. 조부는 공
민왕의 수종공신(隨從功臣)이며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輔功臣)으로 김녕부원군(金寧府院君)
에 봉해지고 수시중(守侍中)에까지 오른 충간공(忠簡公) 김보(普)이다.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김
달문(金達門)이며 어머니는 월성군부인 경주배씨(慶州裵氏)이다.
김합은 용( )과 합( ) 두 아들 중 둘째이며 자는 회지(會之)이고 사재감정(司宰監正-정3품)을 지
냈다. 그의 집안은 고려의 권신 가문이었고 그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 뜻을 접고 음봉 대동에 들어
와 은거했다. 시기는 대략 600여 년 전이다. 다만 왜 이곳을 택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태종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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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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