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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검열(檢閱)을 거쳐 1660년(현종 1)에 대교(待敎)·봉교
(奉敎)·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이어 지평(持平)·사예
(司藝) 등 요직을 맡았다. 1666년(현종 7)에 장령(掌令)으
로서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0년(현종 11)에 황해도 관찰
사에 제수되었고 공조참의·부승지를 거쳐 1672년부터
승지·예조참의를 지냈으며 한성부좌윤·우승지·병조
참의·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678년(숙종 4) 안
동부사가 되어 선정을 펼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맹씨 고택>
오르고 특진관(特進官-경연에 참여하는 3품 이상 문관)
이 되었다. 황해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흉년으로 도민이 어려움을 겪자 진휼청의 적미 4천석으로 기근을
해소하였고 폐지되었던 은율현(殷栗縣)을 복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효행도 지극하여 부모 병환에 손가락의 피를 넣어 드리고 부모상에는 묘 3년은 물론 소상이 지나
서야 채소와 과일을 먹었다고 한다. 효종의 상에 1년간 반찬 없이 밥을 먹었다. 우애도 두터워서 형님 윤
서(胤瑞)가 일찍 죽자 형수와 조카들을 극진히 돌보았으며 남편 잃은 여동생을 가까이에 두고 보살폈다고
한다. 문중에서는‘좌윤공(左尹公)’
으로 일컫는다. 유고로《연행록(燕行錄)》
을 남겼다. 묘는 연기군 서면
고복리에 있고 묘표와 묘갈이 있다.
[37] 맹희도
孟希道
<1337(충숙왕 복위 6년) ~1423(세종 5년) 추정>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신창으로 신창 맹씨 중시조 의(儀)의 손자이자 두문동 72현
인 상서(尙書) 유(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능성(綾城) 구(具)씨이다. 호는 동포(東浦)·호전(湖田)이다.
주로 개경에서 살았으며 정몽주·권근 등과 절친하게 교유했다. 1365년(공민왕 14)에 문과 급제하여 전
교부령·한림어사·한성윤·수문전제학(提學-정3품) 등을 지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이후
아버지 유(裕)가 서두문동으로 들어가자 그도 동두문동에
은거했다. 이로 인해 후손들은 그도 두문동 72현에 포함
시키기도 한다. 아버지가 순절하자 가족을 이끌고 맹씨들
의 옛 근거지인 충남 서천 한산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
서 부친의 가묘를 모시고 3년상을 마친 뒤 1392년경에 온
양 금곡동(현재의 아산시 배방면 중리)으로 와서 고려 말
의 명장 최영(崔瑩)의 집(현재의 고택)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그 후 출사를 거부하고 오직 학문 연마와 강론에 전념하
였다. 이로부터 온양 일대에 주자학(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맹희도의 묘>
전파되었다고 본다. 그는 인근 계곡 못에 다리를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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