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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옛 자취를 찾아서
공주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남산리의 동쪽은 덕지리와 경계를 이
신흥리(新興里)와 부여군 초춘면(草春
루고 남쪽은 탄천면 삼각리 서쪽은 가
面) 세동(細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남
척리와 경계를 이루는데 화정리를 벗
산리라 하고 탄천면에 편입되었다. 남
어나면 논산시 광석면의 넓은 들, 속칭
산리라는 이름은 이 골 전체를 이르던
논산들이 펼쳐진다.
옛 이름 남산골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
남산리에는 선사시대의 입석문화인
여진다.
남산리 입석이 있고 서남생이 고개 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부여군과
(上段) 강건너골과 대학골 사이의 야산
공주시의 경계가 예민하게 그어졌음을
에는 유적번호 공주 082-1과 082-3인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작은 마을 건평(乾
남산고분군이 위치해 있다.
坪)이다. 건평은 남산리 남단에 산자락
금강의 연안으로 토지기구 유적지(草
을 의지하여 앉은 마을이며 토질이 메마
地地區 遺蹟地)와 접해 있는 남산리 고
른 들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이
분군은 토광묘(土壙墓)의 밀집지역으로
름인데 산이나 하천을 경계로 삼지 않고
토기가 출토되는 고분군이다.
신작로를 경계로 삼아 길을 사이에 두고
이곳에는 지석(支石), 마제석검(磨製
왼편은 공주 오른편은 부여군이다.
石劍), 석촉(石鏃:돌화살), 무문토기(無
마을의 형성과 특징
文土器) 등 다양한 청동기 시대의 유물
과 유적이 산재되어 있어서 백제 시대
남산리에는 여러 개의 작은 마을들이
에는 문화의 중심지로서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이는 예전에만 그런 것이 아니
살던 곳으로 추정된다.
고 현재까지도 작은 마을 여러 개가 동
백제 때는 웅진권이 아닌 소부리 사
네의 북쪽 중심에 있는 장군봉과 남쪽에
비군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기에도 부
있는 남산 자락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여군에 속하였다. 고려조에 이루러 공
현대의 행정구역으로 볼 때 서쪽 긴
주목에 속하여 조선시대에도 공주군에
산자락으로 남산리 1구의 마을이 산재
속하였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말엽에
해 있고 동쪽의 아늑한 분지에는 남산
는 공주군 곡화천면(穀禾川面) 지역으
리 2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두 마
로 남산 아래 있던 골이라 하여 남산
을이 아주 다른 역사를 가지고 아주
골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이 이
때 왕촌(旺村), 홍성리(鴻城里), 내동
채롭다.
(內洞), 곤치동(?峙洞), 건평(乾坪)의 일
이들 자연마을 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부와 송정동(松亭洞), 화산리(花山里),
같다.
公州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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