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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 김구와 덕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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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있었고, 지금까지도그렇게믿는사람들이있다.
그러나사실
44)
은 그렇지 않다. 다음에서 논하기로 한다.
2) 훼철 이후
서원은선현에대한향사와지방교육을담당하던곳이다. 오늘날로
치면지방사립대학의구실을했다. 특히사액서원은많은토지와노
비를소유하였으며면세와면역의특권을누렸다. 그러나조선후기에
들어시간이흐를수록붕당의근거지로변질되었으며, 한계와폐단을
드러냈다. 향사를구실로백성들을수탈하여민원(民怨)의 대상이되
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서원은 전국에 600개소가 넘었다.
그러던가운데1863년고종이즉위하였다. 섭정(攝政)을하던흥선
대원군은서원개혁에대한의지가강렬하였다. “백성을해치는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기에 찼다. 고종 즉위
이후로개혁의강도를서서히높여가다가1868년, 1871년두차례에
걸쳐 서원 철폐를 단행하였다. 서원이 소유하던 토지와 노비까지도
몰수하였으나완전하게정리하기는어려웠다. 서원철폐로국가재정
이늘어나고민생이안정되었으나국가여론을주도하는양반유생들
의불만이컸다. 이후서원철폐는흥선대원군의정치적실각으로이
어졌다.
서원철폐령은1868년에처음내려졌으나제대로시행되지못하였
다. 조정의 명령을 즉시 시행하기보다는 상황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가는서원이많아서, 1871년에다시한번강력한철폐령을내릴수밖
에 없었다. 1871년에 전국의 많은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남은 서원 · 사우는 모두 47개였다.
당시 존치의 기준은 ①성균관
45)
44) 김충희, ?자암 김구를 만나다?,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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