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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그때함께생활했던친척중심의마을사람들은모두뿔뿔이흩어져버렸다.지금은시제


,
나벌초를할때만정기적으로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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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암리는 동족 마을이어서 설이나 추석 때에는 60-70명이 모여 차례를 지냈다. 상에 올

?

린 과일이나 과자를 나눠주는 것도 일이어서 집안 어른들이 죽 서서 아이들에게 과일과 과


자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집안에서는 불교를 믿어 산수강을 건너 도비산에 있는 절에 다녔
?


다.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지면 걸어서 건너갔는데 추운 겨울철에도 팬티 하나만 입고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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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정도로독실했다.
언암리 앞의 바다를 산수강이라 불렀다. 송태원 씨가 언암리에 둑을 쌓았고 그 아들인
송석구 씨는 언암리에 아흔아홉 칸짜리 집을 짓고 살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의 땅을
소작 받아 농사를 지었다. 마을에서 산수강을 가면 둑이 나왔고 둑 아래는 바닷물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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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나갔다 했다. 산수강 건너편에 넓이가 20m정도 되는 모래사장이 있었다. 건너편은 서
산읍장동으로염전이있었는데소금을산수강까지운반해와서중선배에실어보냈다.
중선배는 아무 때나 올라오는 것은 아니어서 주로 사리 때에만 올라왔다. 사리가 되면
바닷물이 엄청 밀려와서 모래사장이 모두 잠길 정도로 깊어져 중선배가 올 수 있었던 것이
다.산수강에는큰둠벙이있었는데사리때에물이깊어지면중선배가들어왔다.그런데사
리를지나면물이빠져서사람들이걸어서건널수있을정도로얕아진다.만약중선배가사
리에 들어와서 짐을 싣고 다시 바다로 나가지 못하면 다음 사리때까지 꼼짝 없이 갇혀야만
했다.그만큼산수강은사리와조금에따라물의양에차이가컸다.
일제강점기에 산수강에는 다리가 있었다. 건너다니는 것이 불편하여 주민들이 다리를 놓
았는데 중선배가 다닐 수 있도록 다리 중간에 다리를 들고 문을 열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중선배가 오면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밧줄을 당겨 다리를 들어 올려 중선배가 지나가게 했
다.다리를놓을정도로언암리와산수강은사람통행이많은곳이었다.중선배가산수강까
지 올라온 것은 염전에서 생산하는 소금을 싣기 위해서였다. 항구처럼 접안 시설은 전혀 없
어중선배를둑에대놓고나무다리를걸친후지게로소금을져서실었다.
산수강 한 쪽에는 수문이 있었다. 그곳은 청룡벌이라 불렀는데 마을에서 보면 좌청룡이
어서 그렇게 불렀다. 그 수문 옆에서 마을 사람들은 화염을 만들었다. 바닷물을 평평한 곳
에 모아 어느 정도 증발되면 그를 가마솥에 옮겨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다. 화염을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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