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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란 이후 수도권 방어를 위한 삼도수군통어영에 편입된 사실은 남방의
왜구 방어보다는 수도권 방어 임무에 무게가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왜구 침
입로에 위치하여 내륙 요충으로 들어가는 왜구를 방어하는 기능을 담당하던
남포현 마량진의 위치는 중국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수도권 구원(救援)이라는
기능을 수행할 때는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은 감소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
면서 남포 마량진은 왜적 방어 요충지로서의 중요성보다 뻘로 인한 수군진
운영의 불편성이 더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후기의 충청 수군진의 위치는 조선전기의 왜구 방어 시기와는 다
르게 수도권 방어를 위해 재편성되면서 내만(內灣)하여 숨겨진 곳이 아닌 좀더
바다 쪽으로 나간 육지의 끝단에 설치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내
만한 곳에 있던 마량진이 도둔곶 끝단으로 이설되었던 것이다. 도둔곶은 이
전에도 마량진의 분병수지가 설치된 곳이며, 도둔곶의 끝단은 오늘날 서천군
서면 마량리로써, 분병수지였던 도둔곶보다 더 바다쪽으로 나아간 반도 끝이
어서 바다를 관찰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며, 썰물시에도 바닥이 거의 드러
나지 않는다.
158)
그리하여 현재도 어항(마량항)으로 이용되고 있다.
도둔곶 끝단인 현재의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마량진이 옮겨지면서 이 곳이
마량진으로 불려지고, 원래의 마량진이었던 보령시 웅천읍 황교리는 구진(舊
鎭)으로 불려지면서 오늘날까지도 그 지명이 계속되고 있다.
(3)마량진성
마량진의 이설 초기에는 조정에서조차도 마량진은 남포(보령)에 있는 것으
로 착각할 정도로
159)
남포의 마량진은 그만큼 요충지였던 곳이었다. 충청수영
158)마량항주변은썰물시에도수심이2.7~6.7m에이른다.(앞의海圖)
159)『承政院日記』현종7년1월25일,2월25일조
3.충청수영의속진!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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