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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이었다.
그는 아산군의 제1회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함으로써 공직생활에 들어섰
다. 그러나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어내야 하는 입장에서 선장면사무소를 벗어나지 않은
게십여년이었다.당시첫봉급8천원을받았는데,이는쌀두가마에해당하였고,머슴
은 일 년에 쌀 여덟 가마를 주었지만,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며 일을 시키느라 아내
가관리하기에버거워서퇴근하고나면늘그가나서서하루를정리하곤했다.
새마을운동 때는 공직자로서 밤늦은 시간까지 주민에 대한 계몽활동을 하였으며, 구
태의연한 과거의 농사법을 개선하고자 줄눈의 효용성을 전파하기 위해 직접 모내기에
참여하고 지붕개량을 권고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오해와 고역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
나지금도새마을운동이야말로농촌사회에일대혁신이었다는자부심을가지고있다.
관공서를 출입하는 민원인들이 일제강점기의 서슬 퍼런 기억에 젖어 주눅이 들고 어
려워할무렵,동네어른을대하는자세로친절을다해응대하고편의를제공하였던것이
향후 퇴직을 한 후에 두고두고 농업생활을 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공직생활을 하게
된자식들에게그일을훌륭한교훈으로남겨주었다.
권희영은 선장 사람이다. 선장면은 지금의 행정구역과 달리 남부, 북부, 산간으로 불
리고 있었다. 남부와 북부는 대체로 너른 들녘을 형성하고 있지만, 산간은 하늘에서 내
리는 비에 의존하여 농사를 꾸려야 하는 열악한 동네였다. 땔나무를 해다가 선장장터에
공급하면서벌이를해야했고,을씨년스럽게조성된산속서낭당에제사가있을때면무
서움도잠시떡이나과일을얻어먹는게명절을맞이한듯횡재인시절을살았다.
위로 11대 조상으로부터 이어 내려온 집안이었지만, 먼 곳으로까지 돈벌이를 하러 갔
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혹독한 유년시절을 살았다. 당시로서는 여자 홀로 살아
갈 방도가 없는지라 어머니는 개가를 하셨고, 고아가 되어 숙부의 손에 키워졌다. 초등
학교를 입학하였지만 겨우 9일 만에 중단하고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내 자식
도 키우기 어려운 시절인지라 조카인 자신의 처지를 당연시 여겼고, 먹지 못하여 체구가
작았던 11세에는 몸에 맞는 지게를 손수 만들어 일에 나섰다. 15세부터는 산에서 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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