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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선후기 효종 때에 이르러 마량진은 웅천만구 건너편의 비인현 관내인
도둔곶 끝단으로 옮겨진다.
『조선왕조실록』효종 6년 11월 7일 정해조에,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의(비인현은 남포현의 오기임 - 필자 주) 마량진(馬梁鎭)을
도도(都島)에 옮겼다. 조정이 수사 김한문(金漢文)의 요청을 따른 것으로,
구진(舊鎭)이 배를 정박하는 데 불편했기 때문이다.
『국조보감』효종 6년(1655) 11월조에,
비인현(庇仁縣)의 마량진(馬梁鎭)을 같은 현의 도도(都島)로 옮기도록 명했
다. 옛 진(鎭) 자리가 배를 정박해 두기에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배를 정박해 두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옮겨졌는데, 이때는 마량진
이 요충지로서의 기능보다는 뻘로 인한 불편성이 더 부각되어 결국은 옮겨진
것이다.
이러한 불편성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의 정세변화도 마량진 이설에 크게 작
용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왕조는 일본과의 국교 정
상화에 따라 왜적에 대한 경계는 약화되고 그 대신 대륙의 청나라와의 긴장
관계가 조성되고 이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면서 수도권 방어 중심의 국방 강
화 체제를 구축한다. 그리하여 육군은 수도권 주변에 5군영이 설치되고, 수
군은 인조 11년(1633) 경기도 교동에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하고 경기·황
해·충청도의 수군을 통제하였다.
157)
임진왜란 당시 왜적 방어를 위한 삼도수군통제영에 편입되었던 충청수영
157)『萬機要覽』군정편
284!충청수영(忠淸水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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