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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외 통로의 중요성 때문에 고려 원종 때는 웅천천 하구를 통하여
삼별초가 남포에 상륙하여 남포 감무(監務)를 잡아가기도 하였다.
152)
고려 말에
는 왜구 침입으로 우리나라 해안이 황폐화 될 때, 이곳 웅천천 일대에도 우왕
때인 1380년에 왜구가 쳐들어와서 10여 년 동안 황폐화되었고 백성이 사방으
로 흩어졌다. 그리하여 1390년(공양왕 2) 고남포(현재의 웅천천 하류 웅천읍 수부리)에 남
포진성(藍浦鎭城)을 쌓고 병마사를 파견하여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았다.
153)

것으로 보아 10여 년 동안 왜구들이 웅천천 하구의 포구에 배를 정박시키고
이곳을 교두보로 삼아 내륙지역을 약탈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4)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대외 통로이면서 고려말 왜구의 침입 교두보 역
할을 하던 웅천천 하류지역 고남포에 남포진성(藍浦鎭城)이 만들어져 태안의 순
성진, 덕산의 이산진과 함께 조선초기 진관체제가 정비되기 전까지 충청도
지역 육군 3대 방어기지가 되었다.
이 남포진성의 일선 방어기지로 바다와 만나는 웅천천 하구에 고려말 조선
초에 수군기지가 들어선다.『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충청우도(忠淸右道)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가 남포현(藍浦縣)의 구정(龜井)에 머무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말 이전이나 조선 초기에도 수군기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포현의 구정은 현재 지명으로는 남아있지 않으나 남포현 관할의 해안인 현
재의 보령시 남포면과 웅천읍 해안에서 요충지는 웅천천 하구이외에는 상정
할 곳이 없다.
그런데『세종실록지리지』이전인 세종 18년경에도 마량포(馬梁浦)의 명칭이
152)『고려사』원종13년9월무진
153)『세종실록지리지』남포현조
『고려사』지리지나『세종실록지리지』의 충청도 각 고을 소개에서 왜구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본 고을은
남포현만 기록되어있다. 다른 고을도 왜구 피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포현만 기록 된 것을 보면 남포
가왜구들의주요거점으로교두보역할을하였기때문으로생각된다.
154)금강하구에도 고려말 倭船 500여 척이 정박하여 이 곳을 교두보로 삼고 약탈을 자행하자, 최무선이 화약으
로 물리친 진포대첩이 있었고, 그 무리들을 추격하여 이성계가 남원에서 물리친 황산대첩이 있었다. 이것
으로보면고려말금강하구와웅천천하구는충남지역의대표적인왜구의교두보였던것이다.
3.충청수영의속진!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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