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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찰(願刹)이라든가 하는 점은 군사적 성격이 강하고 나라의 존망과 관련 있는
호국사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절이 사비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 서해안
보령의 사포현(寺浦縣 - 현재 웅천천 하류 지역)에 세워졌다는 것은 백제시대 이 지역
의 기능과 역할의 중요성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때 오합사의 관문으
로 웅천천 하구의 포구가 사포(寺浦)로 불리면서, 대외통로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일본서기』에도 백제 멸망 징조와 관련하여 성주사의 전신이었던 백
제 오합사(烏合寺) 기록
150)
이 나오는 것도 주목되는 현상이다.『일본서기』에 오
합사 기록이 나오는 것은 보령 남포 오합사에 일본 승려들이 내왕하였거나,
아니면 오합사가 일본과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때 일본과
의 통로는 웅천천 하구가 된다.
따라서 웅천천 하구 지역은 금강하구와 함께 백제 시대 사비도성으로 통하
는 중요한 통로였던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성주사는 선문9산의 하나로서 우리나라 선종불교를 크
게 진작시키는 데 기여한 거대한 사찰이었다.『성주사사적기』의 성주사 건물
을 살펴보면‘전단림( 檀林) 9간’이 나오는데 이것은 전단으로 건물을 지었다
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전단은 유향목재(有香木材)로 동남아의 자바나
수마트라에서 생산되었다. 자단(紫檀)이라 불리는 것으로, 이것은 흥덕왕 때
수입을 금지한 사치품이었다.
151)
이러한 전단으로 지은 건물이 성주사에 있었
다는 것은 이것을 해외무역을 통해서 유입시키는 귀족이나 지방 호족의 해상
관문으로 웅천천 하구가 큰 포구로서의 역할을 하였음을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150)『일본서기』, 濟明 4年 백제가 신라를 토벌하고 돌아왔는데 이때 한 말(馬)이 오합사 사찰의 金堂을 行道하
기를 낮과 밤을 쉬지 않았다. 오직 풀을 먹을 때만 그쳤다.(百濟伐新羅還 時馬自行道於寺金堂 晝夜勿息 唯
食草時止(或本云至庚申年爲敵所滅之應也)
151)曺凡煥,「朗慧無染과聖住山門」,서강대학교박사학위논문,1997.
280!충청수영(忠淸水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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