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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불로 고사를 지내는 마을들은 지불의 하나로 동화를 올리는데 볏가릿대는 보름
날 태우지 않고 2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내린다. 곡물을 섬에 넣으면서 천 석이요, 만
석이요 하는 집도 있는데, 이것은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이 풍습은
자연스럽게 이월 초하루 머슴의 날 행사와 연결되어 머슴이나 어린 농부들에게 곡물
로는 떡을 해서 머슴을 먹이고 이웃집과도 나누어 먹는다.
봉림이 칠석제
|봉림리 칠석제의 유래|봉림리의 칠석제는 전통 사회에서는 지역 전통의 고사로
매년 칠월 칠석날 새벽에 올려지던 고사다. 봉림리에는 흉고 둘레가 8m 20cm 이르는
느티나무 정자가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천년된 나무로 믿는다. 이 느티나
무에서 칠석신께 고사를 올려 마을 사람들은 ‘위하는 나무’라고 일컫는다. 칠석 고
사를 올리면서도 정작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위하는 것이다.
칠석제는 느티나무의 남쪽 방향에 제상을 차리고 유교식의 고사를 지내는데 1930
년대 후반까지는 마을의 남자 노인들이 주축을 이루어 봉향하였다 한다. 한 여름 물
것(벌레 등)이 움직이기 전에 고사를 지내기 위해 해 뜨기 전에 고사를 올렸다. 고사를
지내고 오전이 되면 마을 두레꾼들은 두레막음을 한다. 농기와 꽃나비를 앞세우고 정
자나무 밑으로 와서 농기에게 잔을 부어 올리는 농기고사를 간단하게 지내고 하루를
즐기는 형태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대동아 전쟁 직전(1937~1938년 경) 두레를 금기하여 칠석제도 지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수백 년 동안 위해 온 나무에 올리던 고사를
단절할 수 없었다. 고사를 올려야 하기에 당시 대동계장인 서용제와 노인 중 신망이
높았던 이용구 두 명이 이른 새벽 조용히 칠석고사를 올렸다. 마을의 젊은이들 조차
모르게 고사를 지내는 노력으로 칠석제를 지킨 것이다. 두 분의 노력으로 8~9년 동안
올려지던 칠석제는 해방 후에도 같은 형태로 지속된다. 마을에서 칠석제를 옛날처럼
지내자는 여론이 일지 않았고,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봉림리 두레가 1954
년에 폐지되면서 1980년대까지 상기 2인의 고사로 진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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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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