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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안산김씨 김필
| 金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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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서 안산김씨(安山金氏) 15세이며 아산시 지역, 배방면 휴대리 입향조이
다. 경기도 안산 지역에 살다가 들어왔다. 현재 배방읍 휴대리에 거주하는 후손 30세(世) 김제민(金
濟敏, 68세)씨의 15대조이다.
진주목사를 지낸 김성경(金星慶)의 현손(4세손)이고, 이조전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제2차 왕자의 난
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고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진 김정경(金定卿, 1345~1419)의 증
손자이자 숭록대부 판중추원사 김개(金漑, 1405~1484)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성종 14년(1483)에 문
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교감(校勘)을 지낸 김맹강(金孟鋼, ?~?)이고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학자이자 문신이며 시·서·화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은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딸이다.
4남2녀 중 넷째 아들인 그의 자는 자수(子修)이고 호는 모기재(慕箕齋)이다. 학자로서 대사성에까
지 오른 사림의 거두 김식(金湜, 1482~1520)의 문인이다.
김필은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 해(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과 함께 김식이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가 이때 스승을 전송한 것이
죄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집에서 은거하였다. 그 뒤 1521년에 기묘사화의 여파로
다시 사림이 화를 입은 신사무옥에 연루되었다. 이에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화를 면한 뒤 외아들 원
회(元會)를 데리고 온양군 동면 잔교리(棧橋里-현 세교리)의 수터(秀垈-휴대리), 현재의 배방읍 휴대
리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집안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자손들에게“벼슬살이를
하지 말 것”
을 유언했다. 명종 15년(1560)에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국조인물고』
, 『기묘록보
유』등에 그와 관련된 일이 실려 있다. 묘는 선대의 산소가 있는 경기도 안산에 모셔졌으나 안산의
도시 개발로 인해 1978년에 휴대리 종중산으로 옮겨 모셨다.
부인은 전주이씨로 오원군(五原君) 이보정(李寶丁)의 딸이며 1남1녀를 두었다. 김필의 외아들 김원
회(金元會)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지역에 먼저 터를 잡고 있던 문화유
씨(文化柳氏) 집안인 생원 유자기(柳自淇)의 딸과 혼인한 뒤 휴대리에서 조용히 살았으며 수온(守溫),
수공(守恭), 수검(守儉) 등 3남 2녀를 두어 후손들이 인근 각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김원회의 장남 김수온은 청산(충북 옥천)으로 이주했으며 아들 김계남(金繼男, 1555~?)은 중봉 조
헌(趙憲)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초의 금산전투(1592년)에서 의병을 모아 스승을 도우러 갔으나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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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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