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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태어나 효종 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소론의 거두였던 그는
희빈 장씨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될 당시 이를 반대하다 노론파에 밀려 강원도 동해시 심곡리로 유
배되었다. 그의 유배지나 말년에 살던 곳(경기도 용인시 갈담리)에는 사당이 있으나 그의 출생지
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자녀와 함께 약천초당에 들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으로 시작되는 그 분의 시조를 한 번 더 읊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씨 집성촌 형성과 때를 같이하는 수령 600여년의 느티나무 밑 정자에 앉아 삼은 선조 등 조상
의 업적을 자녀와 함께 알아보거나 시골마을의 정취를 음미해 보는 일도 구산사 여행의 묘미이다.
조응식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응식 가옥(우화정)은 장곡면 산성리에 위
치해 있다. 이 집은 양주 조씨의 종갓집이
다. 인조대왕의 왕후였던 조대비가 바로 이
집 출생이고 이후로도 정승이 여섯이나 나
온 명문가다. 현재의 주인인 조환웅씨가
12대 장손으로 40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영
화를 누리고 있다.
우화정은 전형적인 호서지방의 가옥구조
를 가지고 있다. 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되는데 안채는 다시 ㄱ자로 규모가 커졌다. 그
리고 본채동 아래쪽으로 또 한 구역의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다. 즉,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가
의 형태를 취하고 아래쪽에 또 하나의
자형 집들이 서 있는 형태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오고 우측의 일각대문을 또 넘어야 안채에 닿는다. 이 집에
서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곳은 사랑채다. 이곳과 정면의 행랑채에서 주로 고택체험과 민박이 이
루어지기하며 우화정이라는 이름과 내력이 모두 사랑채에 남아 있다.
사랑채 오른쪽에 앞쪽으로 내민 개방공간에 우화정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이는 조선영조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자하 신위 선생이 직접 글을 써서 달아준 것이다. 그리고 우화정 현판
아래의 벽면에는 천하태평이라는 문구와 태극 궤가 함께 그려져 있다. 우화정은 주변경관과도 아
주 잘 어울린다. 집 뒤로 수백년 된 노송들이 수 십 그루 서 있고 나무 사이로 학성산까지 산책로
가 나 있다. 집 앞의 작은 동산에도 송림이 울창해 삼림욕을 할 수 있을 정도이며 좀더 안쪽에는
활엽수림이 넓게 분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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