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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맹유
孟裕
<1315(충숙왕 2년 ~ 1389년 추정 >
고려 말기의 문신이며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신창 맹씨 중시조인 이부전서(典書) 의(儀)의 아들인
데 의(儀)는 맹가(맹자)의 51세손으로 충렬왕 때 예부 전서에 오르고 충선왕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져
서 신창을 본관으로 했기 때문에 신창 맹씨의 중시조 겸 1세조가 된다. 유(裕)는 개경에 살았으며 부인은
능성(綾城) 구(具)씨 총랑 기(技)의 딸이다. 고려 충목왕 때에 문과 급제한 뒤 순창군사(淳昌郡事)를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올랐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직후 사돈간인 최영이 처형되고 이성계 등이 정권
을 장악해가자 이에 반대하며 태학생 조의생, 임선미 등과 함께 개경 인근 광덕산의 서두문동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아들 희도(希道) 역시 동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이들을 일컬어
‘두문동 72현’
이라고 하는데 그 중 일부는 두문동에서 순절했고 대부분은 전국 곳곳에서 은둔 생활을 했
으며, 일부는 결국 조선 조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아들 희도에게 가문을 위해 떠나도록 하면서 자신
은 끝까지 남아 생을 마감했다.
<맹의와 맹유의 단비>
<세덕사>
그 정황은 알 수 없으며 묘도 전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들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어
영조의 명으로 1751년(영조 27)에 이들을 기리는 비(두문동비)가 세워졌고 정조는 1783(정조 7)년에 성균
관에 표절사(表節祠)를 건립하여 충절을 기렸다. 현재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있는 세덕사(世德祠)에아들
희도, 손자 사성(思誠)과 함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의 위패는 1934년에 개성에 세워진 두문동 서원이
얼마 못 가고 일제 말기에 훼손되자 그곳에서 모셔온 것이라 한다.<문중에서는‘두문동실기’
에 기록된 맹
호성(孟好性)을 맹유(孟裕)로 보고 있다.> ※1세조 의(儀)의 묘소는 실전되었고, 1801년(순조 1) 서천 한산
의 축동에 단(壇)을 세워 향사해오다가 지난 2005년에 아산시 법곡동(法谷洞)으로 옮겨 모셨다.
[36] 맹주서
孟胄瑞
<1622(광해군 14년) ~ 1679(숙종 5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창으로 온양 출신이고 아버지는 부사 세형(世衡)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
씨이다. 자는 휴징(休徵)이다. 1654년(효종 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정자·주서·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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