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80페이지

272페이지 본문시작

도 젊은이들에게 열 두발 상모를 가르쳐 공연을 할 수 있는 기량에 이르게 하는 재주
가 있었다. 난이도가 높은 단상을 50대까지 직접 공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박상쇠의
장터 풍장패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3년경 출생자로 예산 풍장패 최고의 재담꾼으로 회자 된다. 풍물은 치지
최승천
않았으며 예산 풍장의 유일한 잡색놀음으로 가짜 양반을 역할을 하였다. 입담이 좋아
풍장이 쉬어가는 판에서 재담을 즐겼다. 박상쇠 풍장판에서도 잡색과 재담판을 이끌
었다. 박상쇠의 성격이 까다롭고 예능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는 고집이 있어, 자신
이 직접 가르치지 않은 풍장꾼은 판에 잘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최승천의 재주를 좋
아하여 항상 그에게 기회를 주고 함께 하였다 한다.
1896경 출생의 시량리 풍장꾼. 덕산에서 1930~40년대 부쇠를 치기기 시작
박갑돈
하여 풍장을 배웠으나 장구로 바꿔 치면서 풍장잽이로 이름을 날렸다. 예산 최고의
장구잽이로 회자된다. 다른 마을에는 상모꾼들이 개인기를 선보였으나 시량리에서는
박갑돈이 장구로 개인기를 선보였고 상모보다 인기가 좋았다. 예산군 풍장대회에서
개인상을 타기도 하였다.
1901년경 출생자로 인건배의 둘째 동생. 장구잽이로 활동하면서 덕산 풍장
인돈배
을 이끌었다. 풍장의 장구잽이로 알려지기 보다는 인건배와 함께 풍장패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경 출생자로 덕산을 대표하는 북잽이다. 젊어서 한 번 이사를 하였으
어일담
나 북을 잘 치는 것이 소문나자 이사 전후 양쪽 마을의 풍장잽이로 활동했다. 어씨
성을 따서 ‘어북’으로 불렸으며 북을 메면 혼자서도 능히 북춤과 연주로 대중을 휘감
았고 춤사위가 좋아 어북이 뜨면 아낙네들이 몸살을 앓는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그의
북춤은 배운 사람이 없어서 지금은 연행하는 사람이 없다.
270
예산의 소리

272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