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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묘하 자손의 사명감으로 조상에 대한 극진한 제례는 물론 묘역을 지켜내겠다는 마
음을 앞세워 격변하는 근대화에 버텨왔다. 자식도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산중 시골마을
에서요즘은하나둘씩빈집이되어가는마을의적막함을지켜보고있다.
오늘의 산양리 1, 2, 3구는 합구였던 산양리로 모두가 한동네였다. 옆 마을 강청리와
는 산길을 헤쳐 들어야 하고 더 멀리 아산장에는 고개를 넘나들었다. 갯벌에 가로막히
고 산으로 둘러싸인 산양리에서는 경사진 곳을 개간하고 일구면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
람들끼리 평화롭기만 하였다. 누구라도 어려웠던 시절인지라 우마차길을 다니면서 그
는 국문을 깨치고 마을의 훈장님과 천년고찰 세심사에서 한자를 얻어 배웠을 뿐이었다.
1934년 일제강점기 시절 토지측량에 나선 일본인들은 산양리 1번지를 명명하고 나서
점심 식사하러 강청리에 갔다가 식후에 업무를 재개하면서 산너머에 2번지를 기재하였
다.1번지와2번지가1.5km나떨어진이유이다.엉성하고도정립되지않은행정체제하
에서도 그는 조상이 대대로 이어주신 종산과 토지를 목숨처럼 지켜내는데 눈을 부릅떴
고,수많은묘역의풀을깎으며보살피는일을하며살았다.
이제그는80여평생의사명을내려놓았다.때마침인근에개설하게된골프장이종토
의 토지매입으로 추진되었고 조상의 은덕으로 살아생전의 숙원사업이었던 납골당의 건
립을 이루어 내게 된 것이다. 원뿌리였던 김포지역에서 분가한 500여 년 전 조상의 묘
소가 경기도권의 개발로 인해 이장을 하게 됨에 따라, 다만 한줌의 산소 흙이라도 퍼서
아산의 산양리에 모시는 일은 근본 뿌리를 정립하고자 애쓰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일
이다. 경제적인 외형의 모습에서 찾을 수 없는 양반가의 꼿꼿한 자존심이이라 할 수 있
겠다.
고찰 세심사가 지진으로 피해를 입으면서도 큰 바위가 법당을 비켜나고, 마을 아낙과
무속인의 기원을 받던 정자나무가 불에 타고 태풍에 쓰러짐을 보면서도 조상들이 지켜
내고 기원을 일삼던 영물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가 심은 소나무가 오늘날 현충사의 정원
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뒤뜰의 모과나무가 용인 에버랜드의 멋쟁이 나무로 각광받는 자
부심은평생을산양리에서벗어나지않은삶에대한일종의보상심리로보여진다.
아산시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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