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80페이지

270페이지 본문시작

예산의 풍장인들●●●
예산 풍장인들의 기록은 지역 예술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밀접
한 관계가 있다. 활동한 개인의 예능보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풍장을 즐겼느냐의 문
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삽교 목씨 집성촌인 상소에서 살다가 시량리 상가 자리로 이주했다.
박익수(박상쇠)
194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예산 최고의 상쇠로 활동하였다. 박상쇠는 일제
강점기에도 마을풍장을 활발하게 치며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 1946년경부터 풍장꾼
을 공개적으로 모집하여 풍장단을 구성하고 가르쳤다.
처음 단원을 모집했을 때 상쇠를 희망한 사람이 20여명에 이를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렸는데 모든 재주를 박상쇠가 직접한 시험하고 평가하여 악기를 정해주어 풍물을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 송창용을 수상쇠로 선발하여 자신의 상쇠가락을 모두 이어나
가려 노력하였다. 칠석 풍장은 무조건 쳐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여 칠석날은 덕산장에
서 백중전의 장날에는 예산장과 덕산장에서 풍장을 반드시 치려하였다.
70세를 넘어 사망하였으며 후손은 모두 이주를 하여 연고를 찾을 수 없다. 그의 제
자인 송창용조차 박상쇠의 본명을 가억하지 못하여 호적 등의 기록으로도 찾을 수 없
었다. 향후 반드시 추가 조사를 요하는 중요 인물이다.
삽교오가면 월평리를 주요 활동지로 삼하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
이점식
까지 예산 최고의 상쇠이면서 풍장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예산 일원의 풍장만이 아
니라 경기 일원의 남사당. 웃다리 풍장에 두루 능하였다 하며 판재를 구성하는데도
기존의 판재에 억매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넣고 빼는 것에 자유로운 인물로 증언되며
당진의 최순구와 함께 예산 당진의 최고 풍장인으로 칭송되었다.
단원의 구성은 상쇠 부쇠 징 각 1명 장고 북 각 2명, 열두말 상모 1명 단상 3-5명,
이었으며 마당 판굿에 능하여 잡색이나 개인 예능을 중요시 하지 않아 판을 잘 만드
는 사람으로 회자되고 있다.
268
예산의 소리

270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