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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간암(가늠)으로그물을놓고,통행하기도하였다.

남,
옛날에는 장비가 없어, 항로나 그물 놓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모두 섬

과 섬의 겹쳐진 상태, 섬과 육지의 겹쳐진 상태 등을 보아 위치를 확정하였다. 이를 간암(



가늠)이라고하였다.




1950~1960년대,봄이되면무창포술집에20~30명의기생들이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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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년대 무창포에는 100여 척의 어선들이 몰려들었고, 10여 곳의 술집이 번창
해서 기생들도 20~30명 모여들었다. 무창포에는 이들 기생들에게 빨래를 해 주고, 옷을
다려주는주민들도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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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창포에는여러샘이있어이용하였다.
무창포에는위뜸에큰두레샘이있어주민들과선원들이이용하였고,물이부족하면논
에 있는 샘에서도 떠다 먹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어업조합 남쪽, 도로의 남쪽에 샘을 팠는
데, 아주 깊었으나 물은 시원하고 좋았다. 양조장에서는 독자적으로 마당에다 샘을 파서
이용하였다.좀염기는있어도맛은좋았다.
무창포에서는발동기를가지고다니면서방아를 찧다가방앗간을만들었다.
무창포에서도다른마을과같이발동기를가지고다니면서,보리바슴도하고방아도찧
었다. 그러다가 방앗간을 지어 정착했는데, 무창포에서는 벼락 재 밑, 간드리하고 갈라지
는곳에있었다.방앗간을마지막으로운영한사람은김진원씨였다.
무창포양조장은웅천양조장과합병되었다가없어졌다.
무창포양조장은 1950~1960년대에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경영이 점차 어려워져 웅
천양조장과 합병하여 운영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양조장이 문을 닫은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지근여와우러녀는처녀들이죽은슬픈이야기가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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