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6페이지

24페이지 본문시작

요인이 되고 있다. 풍수적으로 진악산의 중심은 물굴봉으로 좌청룡이 관음봉이고 우백호가 노적
봉에 해당이 된다.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물굴봉 자락에 금산 인삼의 효시가 되는 강처서 효행설화
을 간직한 강처사 고택과 진악산 산신을 모시고 있는 개삼각이 있고, 금산의 서원이 효시가 되며
당시 금산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야은 길재 선생, 율정 윤택 선생, 낙천재 김신 선생 등
금산의 성현을 모셨던 성곡서원이 있고, 선사시대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다. 관음봉 자락에는 강처사의 효행설화와 관련이 있는 관음굴이 있고 봉화대의 흔적이 있어
지금은 진악산의 주산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노적봉 자락에는 풍수적으로 장자가 방아를 찧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노적봉이라 부르고 있다. 위에서 잠깐 말했지만 진악산이 금산의 상징으로
자리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용의 설화로 전승되고 있는 물굴봉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민속으로 등잔혈의 혈처이다.
예로부터 가뭄이 심하면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으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기우제를 지냈던 풍습니다.
산신을 대표하는 호랑이와 수신을 대표하는 용의 대결 양상으로 결국 수신인 용이 승리하는
것으로 극도로 흉흉한 민심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악산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물굴 아래를
보면 물굴봉의 또 다른 혈처로 호롱혈이라도 부르는 자리에 묘를 쓰면 당사자의 집은 누대로 복을
누리지만 비가 오지 않는 다고 하여 파묘를 한다고 한다. 파묘를 하기 전에 물굴의 용신을 위하여
산신제를 모시고 그곳을 파보면 반드시 밀장을 한 시신이 나온다고 한다. 개인의 복보다 세상
사람 모두를 위하여 존재하였던 금산의 상징이며 명소라 할 수 있다. 개삼각이 이곳에 존재하게
된 이유 또한 범상하지 않다. 백제시대 성곡마을의 강처사가 어머님의 병환을 낳게 하기 위하여
관음봉 관음굴에 가서 기도를 올리던 중 산신의 현몽으로 얻은 인삼씨앗(삼딸)을 이곳에 처음
으로 심었다고 하여 개삼터가 있고 또 그때 얻은 진악산신의 영험을 기리기 위하여 그 자리에 산
신각을 지어 매년 금산인삼축제 개삼제를 이곳에서 모시고 있다. 금산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세계적인 인삼약초시장으로 발전하게 한 명산으로 존재하고 있다.
둘째로 진악산의 이름을 있데 한 요인이 지리적인 위치라 할 수 있다. 과거 진산군과 금산군의
경계이고 지금의 영동군 등 세 지역의 중심지가 진악산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세 지역은
산악지대와 평야지대를 가르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사비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접전지이며
부여로 통하는 요새지로 알려진 탄현이 이 산맥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당시 진내군의 치소로
알려진 조종산성이 관음봉 또는 수리봉에서 이어지고 있다. 새가 날개를 펴고 웅비하는 형국이라
수리봉이라 하였는데 그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조종산성은 천혜의 읍치로 고려말까지 읍치로
자리하고 있어 진악산의 또 다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24 |
2011_05

24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