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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으로 협력학교가 지정되어 그곳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 이화영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바 있다. 어떻게나 강의를 재밌게 하시는지 까다로운 수학강의라는 느낌이 전
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도표와 예화를 많이 들어 수강자들로 하여금 쉽게 강의내용
에 접근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충북 청주 교원대학교에서 초등학
교 교장 연수를 받을 때 이화영 교수님의 특강을 들은 바도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초중등 각급의 교장 후보자들을 넓은 대강당에 모아놓고 하는 대형 강의였다. 전체
적으로 재미있고 인상 깊은 강의였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
은 인간의 나이와 오관의 기능에 관한 것이었다. 이 교수님은 왜 사람이 나이를 먹
게 되면 시력이 나빠지고 귀도 조금씩 어두워지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었다. 사람
이 나이를 먹고 차츰 학교의 교장과 같이 높은 자리, 지도자의 자리에 가게 되면 작
은 것은 더러 눈감기도 하고 작은 소리는 더러 흘려들을 줄도 알라고 눈도 조금씩
흐려지게 되고 귀도 그렇게 어두워진다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전혀 과학적이고 객
관적인 내용이 아니라 인생론적이고 형이상적인 내용이었지만 오래 오래 간직하고
음미할만한 말씀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이화영 학장님의 정식 대학교 제자는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그분을 은사님으로 모시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선생의 고향은 논산. 1930년 출생(음력으로 10월 3일이 생일). 올해로 산수(傘
壽:80세)의 연세이신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어른이다. 일찍이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학고 6·25 당시 논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가 서울대 사범대학에 편입하여 다시 졸업하고 중등학교 수학교사가 된다. 1953년
23세의 나이로 서울사대 부고에서 1년 근무하다가 그 이듬해 경기고등학교로 자리
를 옮겨 1957년 공주사대 교수로 부임하기까지 대한민국의 내로라는 수재들을 가르
친다. 오늘날 이름만 대면 누구나 대번에 아, 그 사람! 하고 알만한 이름들이 떠오른
다. 이미 이때 중등학교 수학과 참고서를 7권이나 집필하는 학문적 업적을 쌓는다.
1960년, 상당히 늦은 나이에 논산 훈련소에 입대한다. 나이는 30세, 대학에서는 이
미 부교수가 된 뒤였다. 1년여 우여곡절 끝에 교보(한 시절, 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했던 특별한 병역제도)로 병역을 마치고 다시 공주사대 교수로 복귀하여 2년 남짓
준비하여 중등학교 수학과 검인정 교과서를 저술하여 전국적으로 활용토록 하는 동
시, 유명한 수학과 교수로 이름을 드날리면서 미국 미죠리주 콜롬비아대학에서 명
예이학박사를 받기도 한다. 선생이 공주사대 교수로 봉직하면서 가장 두르러진 업
적은 이렇게 수학교육자로서 뿐만 아니라 공주사대를 공주대학교로 만든 초석을 놓
은 분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주사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야한다
公州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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