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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양주 조(趙)씨 눌(訥)의 딸이고 부인은 해주 최씨 준(濬)의 딸이다. 자는 여평(汝平), 호는 하곡(霞谷)이다.
그가 어렸을 때 낚시질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울면서‘너는 과부의 아들로 학문을 폐하고 이리
하느냐’하시니 그도 슬피 울면서 마음을 다잡고 학문에 전념했다. 좌윤 여유길(呂裕吉), 장령 조익(趙翊),
참판 이명준(李命俊)에게 배웠으며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에 문과 정시에서 을과 1위
로 급제했다. 성균관 학유(學諭)·박사·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호조좌랑·형조정랑을 지냈다. 예조정
랑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기용된 뒤에는《광해군일기》편찬에 참여했다. 이어 종묘서령을 역임한 뒤 1629
년(인조 7) 금산군수로 업적을 남기고 호조 낭관이 되었으며 다시 장흥부사로 나갔다가 제용감정이 되었
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에 선산부사로 제수되어 금오성(金吾城)을 수축하고 군정을 정비한 뒤 군
사를 모아 남한산성으로 달려가고자 하였으나 경상감사의 명령으로 중지했으며 난이 삼전도 굴욕으로 끝
나자‘시무10조’
를 올려 척화신(斥和臣)의 등용 등을 건의하였다.
그 뒤 상의원정·울산부사·성균관직강·사예·통례원통례·정주목사·개성부경력·안동부사 등을 거
쳐 봉상시정(奉常寺正-정3품)으로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검박하고
올곧게 살아온 생을 1656년에 69세로 마감하였다. 사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 등에 추증
되었다. 문중에서 안동공(安東公)으로 지칭되는 그의 묘는 온양 백악동(白岳洞- 송악면 동화리 배골) 선
산에 있다가 부인이 죽자 광덕산 기슭 금곡(천안시 광덕면 매당리)에 옮겨 합장했다.
[34] 맹욱
<1602(선조 35년) ~ 1687(숙종 13년)>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신창이다. 명신 사성(思誠)의 후손으로 어매장군을 지낸 안인(安仁)의 증
손이고 사첨시정 익선(翼善)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수의부위 유청(惟淸)이며 어머니는 풍산 심(沈)씨로 대
호군 안주(安舟)의 딸이다. 자는 사후(士厚)이며 부인은 청주 한(韓)씨와 원주 원(元)씨이다. 무과 급제하
여 훈련원 판관(종5품)이 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안현(鞍峴-서울 서대문
밖 길마재) 전투에 참여하여 대첩을 거두어 진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인
조)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었는데 그는 적을 뚫
고 성으로 들어가 왕을 호종했다. 동상을 입어 피
부가 상하고 손과 발이 모두 터진 것을 본 왕은 그
의 충성을 가상하게 여겨 선전관을 특별히 제수했
고 강화도에 두 차례나 사신으로 다녀왔다. 1678
년(숙종 4)에 절충장군이 되고 4년 뒤인 1681년 가
선대부에 올랐다. 그가 86세로 세상을 뜨니 당대
의 대학자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이 묘지(墓
誌)를 짓고 종친(왕족) 뇌풍재 이흠요(李欽堯)가 행
장을 지었다. 묘는 송악면 동화리 백학동(배골) 사
좌에 있고 묘표가 있다.
<맹욱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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