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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마리 고개 : 삿골에서 영인면 성내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 .
배 티 : 산숫골에서 신수리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 이근처가 바다이여서 이 고개로 배가 넘
어 다녔다고 한다.
7)
전설
고목나무
이 동네의 맨 끝집의 옆에는 아주 오래된 고목이 있다. 동네 어른들 말씀에 이 나무는 지금
부터 약 4백년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고목나무 속에는 옛날부터 아주 큰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구렁이가 동네를 지킨다하여 매년 갖가지 음식
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한다. 제사를 안지내면 구렁이가 노하여서 큰 홍수를 일으킨다
고 한다. 어쨌든 그 고목나무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다른 나무보다도 더 푸르게 자라고
있고 그 누구도 이 나무를 베어 내지 못한다고 한다. 고목나무의 웅장한 모습이 우리마을을
돋보이게 하고 흉년이 없는 평화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 같다.
8)
전통놀이 및 대표적 집단행사
이 마을에서는 특별히 전해지는 전통놀이는 없다. 다만 마을 사람들이 집단행사로 경로잔치
와 효도관광등이 있어 마을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이밖에도 마을 사람들은 작
은 계를 하여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을 더욱 다지고 있다.
9)
특별하게 소개할만한 인물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이조 선조때의 명장으로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 본관은 덕수, 영중추 부사 변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한성 건천동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전쟁놀이에는 항상 대장이 되었으며 동네에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그가 나서서 해결 지음으
로 동네 사람이 다 두려워하였다. 장성하면서 그 는 뜻을 무예에 두어 기사를 연습 훌룡한
재능을 연마하였다.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 훈련원 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섰으며
발포 만호를 거쳐 1586년에 사복시주부가 되고 이어 조선 만호가 되었고 녹도 둔전사의가
되었다. 이때 순신은 국방의 정화를 위하여 병력의 증강을 요구하였으나 절도사 이 일에 의
하여 부결되었으며 그해 가을 적은 병력으로 호인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순신은
홀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잡아 드렸다. 이일은 피해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돌려
그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무죄가 판명되어 해임으로 그쳤다. 그후
전라도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등이 되고 185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
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 첨사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되던해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이때 전쟁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미리부터 군
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추어 이에 대비하였으며 특히 거북선을 만들어 전쟁에 임하게 하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패장 원균의 요청을 받아 함대를 이끌고 적의 수군과 싸워 이를
도처에서 격파 하였다. 즉 제 1차 는 옥포 적진에서 제2차는 사천 당포율포에서 제3차는 한
산도 안골포에서 제4차는 부산포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한
산도와 부산포의 싸움은 유명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일본군은 결정적 타격을 받고 순신은
완전히 재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는 그의 위대한 지도력과 탁월한 전술로 인한 것이며 조정에
서는 위의 공으로 그에게 정현대부의 벼슬을 주고 최초로 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원균일파와 일본의 이간 책으로 1559년 2월에 서울에 압송, 고문 끝
에 사형을 받게 된 것을 판중추부사 정탁의 반대로 사형이 면제되어 4월1일 권율의 휘하에
서 백의 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균은 안일과 방탕한 생활로 군비를 소모, 정유왜란이 일
어나자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나 대패하고 전사하니 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졌다 사태의
긴급함을 느긴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 적을 막게 하였다. 이때 그는 어머
니의 상을 당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임지에 도착하니 남은 배는 겨우 12척 뿐이고
군대의 사기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적은 병력으로는 적을 대항하기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
는 한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고 다가오는
전투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8월 15일 저의 대부분을 명랑에서 대파하여 다시 재해권을 장악
하고 명나라의 건인이 거느린 5천의 수군과 합세 위세를 떨쳤다 적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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