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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문화원
문화의 향기를 담아내는 소담옹기
[17] 효자 맹사성 <孟思誠>
1360년(고려 공민왕 9) ~ 1438년(세종 20)
7일간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고 애통해 하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명재상·청백
리이자 효자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에 이부 상서를 지내고
이성계 등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숨진
‘두문동 72현’맹유(孟裕)이다. 아버지는
신창맹씨로서 온양에 처음 들어와 살기 시
작한 맹희도(孟希道)이다. 어머니는 흥양
▲ 효자 맹사성 정려 명정현판
(興陽) 조(趙)씨이다. 맹희도는 고려 말에
수문전제학 관직에 있었으나 역시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개성에서 충남 서천군 한산을
거쳐 온양 금곡동, 즉 지금의 아산시 배방면 중리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개성에서도 친밀
하게 지내던 고려 말의 명장 최영(崔瑩)의 아버지가 지어 놓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이 지
금의 맹사성 고택이다. 맹사성이 최영 장군의 손녀와 혼인을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맹사성의 자는 자명(自明)이고 호는 고불(古佛)이다. 그는 개경(개성)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맹사성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는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
를 극진하게 간병하며 모셨다. 그러나 그가 열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7
일간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고 애통해 하였다. 또한 삼년상을 치르면서 몹시 슬퍼하며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가 어머니의 시묘를 하던 중에 무덤 앞에 있던 잣나무를 산
돼지가 자꾸 와서 파헤쳐서 죽게 되었다. 이를 보고 3일 동안 통곡하니 호랑이가 와서 그
산돼지를 물어 죽였다. 세상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듣고 모두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399년(정종 1)에 생정(생정려, 즉 그가 살아 있을 때 받은 정려)이 내려졌다. 또
한 그의 효행 사실은 아버지 맹희도의 효행과 함께《동국신속상감행실도(東國新續三綱
行實圖)》
에 부자의 효행 내용이 실려 전해진다. 맹사성은 고려 말(1386년)에 문과(대
과)에 장원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고려가 멸망하자 아버지와 함께 한산에 내려가 은
거하다가 온양에 왔다. 그 뒤 왕의 부름과 아버지의 권유로 다시 조선 조정에 나아가 중
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마침내 1431년(세종 13)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동안 태
종의 세자 양녕대군의 스승이 되기도 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또한 음
악, 역사, 지리,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가 강직하고 검소했던 청
백리라는 사실과 그가 남긴 많은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의 효행에 뿌리
를 둔 일이었다. 그의 효자 정려와 효자비는 아버지 등 다른 분들의 정려와 함께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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