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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끓이고 독새풀로 연명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엔 걸어서 4km에 달하는 선장초
등학교까지의 등굣길을 마다않고 다녔다. 당시에는 서슬이 시퍼런 일본인 교사가 한 달
에 표 10장을 나눠주고 조선 학생의 조선 발음이 적발될 때마다 표를 뺏어갔다. 표를 모
두 빼앗긴 어린 조선 학생은 엄한 벌칙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우리말 말살정책을 펼쳤
던제국주의말엽의혹독함을그는견디어야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의 패악질은 가혹하기만 하였다. 비교적 농토가 넓었던 선장 뜰
은 일본인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뙤약볕 아래 부지런히 농사를 지은 마을 농민들의
고초는 아랑곳 않고 전체 수확의 9할을 공출해 갔으며, 1할의 쌀로써는 도저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었던 농민들은 마름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한밤중에 볏단을 감추고 파묻
어서 자식들과 노부모를 먹일 식량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했는데, 해
방의기쁨도잠시곧이어맞이한한국전쟁의상흔은더없이크기만하였다.
홍곳리에는 경주김씨가 대를 이어 농업을 영위하고 지내온 만큼 빈곤하지 않은 살림
살이에 온 일가끼리 모여 살았건만, 난데없이 닥쳐온 6·25전쟁은 한순간에 마을의 분위
기를 뒤집어 놓았다. 한때 65호의 호수로 구성된 홍곳리에서는 약 십여 호가 좌익의 기
치를 들고 이웃 간에 평생의 원수를 대하듯 흉폭한 일을 저질렀고, 때문에 비교적 지주
역할을 하던 경주김씨네의 시련이 매우 컸다. 18세인 그는 할 수 없이 소년단에 가입하
여 북조선의 공산당 노래를 배우면서 견디어야 했다. 그런데 전후에 다시 분위기가 바뀌
어 복수극이 펼쳐지면서 상당수의 마을 사람들이 홍곳리를 떠나야 했고, 마을의 가옥
은절반으로줄어버렸다.
그는 젊은 시절 마을 어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리(里) 서기를 지냈고 군대를 마치자
승진한 것처럼 홍곳리의 이장을 맡아 십 년 넘도록 마을을 위해 애를 썼다. 술을 마시지
도 않으며 정확하게 일처리를 한 덕에 마을의 협조를 이끌어 내었고 고지서를 발부받아
납부를 대행하고 비료를 분배함에 차별이 없도록 하였다. 홍곳리는 삽교천의 개발로 인
해펼쳐진갯벌이농토가되면서아산시에서도내로라하는부촌으로점차변모해갔다.
홍곳리에서 걷어가는 농지세가 아산시 송악면 전체보다 많다고 할 만큼 풍요로움을
아산시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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