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80페이지

263페이지 본문시작

를 올리며 명맥을 이었다. 새벽에 조용히 올리던 칠석제는 해방 후는 물론 한국전쟁
후까지 계속되었으나, 서용재와 이용구가 사망한 후에는 이용구의 처가 혼자서 이를
행하였다.
이용구의 처이며 남춘희의 어머니인 이미원에 의해 조용히 올려지던 봉림리 새벽
칠석제는 1990년대 중단되어 명맥이 단절되나 느티나무 정자아래서 올리던 칠석제가
그친 후 마을의 젊은이들이 비명에 죽는 일이 반복되면서 마을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2004년 칠석 때부터 다시 드리게 된다. 예부터 지내온 마을 고사로 복원하였고, 칠석
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적 성격을 더하였다. 복원된 이후로는 지금까지
매년 올려지는 예산군 유일의 여름 마을 고사로 자리 잡고 있다.
봉림리 칠석제는 타 지역의 칠석제와 같이 마을 두레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
다. 여름 두레 논을 매는 두레 공동 작업이 칠석날 끝나며 여름 두레를 이날 봉림리
정자나무 밑에서 즐겼던 것이다. 마을의 주민이 천 년 되었다고 믿는 느티나무 정자
는 아직도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흉고의 나무 둘레가 8.2m에 이르는 아름다운
정자나무다. 이 나무 밑에 농기(용대기)와 영기를 세우고 여름 두레를 먹었는데 이날
새벽에 마을의 성인 남자들이 고사를 지냈다.
고사를 지내는 주체와 여름 두레를 먹는 주체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봉림리에는
지금도 마을의 대동계장이 선출되어 마을을 운영하는 주요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명
칭은 ‘대동계장大洞契長’이며 이 마을의 대동계가 주관할 마을 고사가 칠석제뿐이니 칠
석제는 대동계에서 주관하고 여름두레 먹는 것은 두레가 주관한 것으로 보인다. 봉림
리의 마지막 두레 좌상은 김봉필이며 1986년 경 출생하였다.
마을의 전통을 힘겹게 지켜온 봉림리 칠석제의 영향으로 이 마을에는 다른 마을들
과는 다른 풍장이 존속해 온 것으로 채록된다. 아쉽게도 당시의 상쇠나 장구잽이가
생존해 있지 않아 확실한 가락은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북잽이의 연주 기법으로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2장 예산의 소리
261

263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