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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성당이 지어진 초창기에는 성당의 맞은편 동산에 대형 물탱크를 만들고 옹기
로 관을 만들어 성당 마당에 분수를 조성함으로써 인근의 큰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으
며, 당시 주석하셨던 에밀드비즈 신부님이 현재까지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조력발전소
를 구상하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획기적이었다. 더불어 천주교의 초장기 선교사들의
6·25전쟁 당시의 수난사에 대해서도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참상이 많다. 이것이 낱낱이
규명되기를바랄뿐이다.
공세리는 조선시대 중엽부터 300여 년에 이르도록 조세창이 운영되던 마을이다. 현
재까지도 창고 터의 옛 유구가 잔존하는 공세리는 과거에 충청 인근 40여 고을에서 이
송된조세미를관리하느라관료를비롯한주변인구가많았고,그들로인해매우번성한
마을이었다.그러나조세창의역할을마친이후현재는한적한시골마을이되었고,주변
의 환경 변화에 따라 바다가 메워져 옛 흔적들은 거의 사라진 형편이다. 각지에서 조세
미를 운송하던 배들이 식량과 연료를 조달하느라 형성된 ‘밥전거리’는 세월이 흘러 밤을
팔던‘밤전거리’라잘못알려지기도하였다.
지금은 너른 농토가 된 인주의 들녘은 조수간만의 차가 인천 앞바다의 경우를 능가하
여 백중사리 때면 경기도 안성지역을 넘어 서정리까지 들어찼다가, 빠질 때의 물살은 무
서울 정도로 거세게 몰아쳤다. 바다가 보이던 공세리 성당 언덕의 옛 모습은 지금으로서
는상상하기어렵다.
한편 당시로서는 흔하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고충을 주었던 질환인 피부종기에 특효약
이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던 ‘이명래 고약’이 공세리 성당의 신부님으로부터 전수
받은약에기인하였으며성당의미사에쓰이는포도주를프랑스로부터조달하기에어려
움을 겪던바, 아예 포도주를 생산하는데 이용하기 위해 포도묘목을 심어 전파한 것이
현재 명물로 자리한 안성지역에서부터 천안 입장, 그리고 탕정 포도의 시발점이 되었다
는점도공세리성당의근대사에빼놓을수없는역사적내용이다.
지리적으로는당시군사적요충지로서공세리의중요성이컸는데,구한말에발발한청
일전쟁의 격전지였던 이 지역에서 풍도 앞바다의 전투와 성환에서의 전개에 따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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