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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창포도창고창자를써야하는데,창성할창자로하였다.




6.25당시무창포에는인민군중대가주둔하였다.


6.25당시라인균님은14살이었다.인민군들이들어와경비하였는데,벼락재구도로북
쪽 솔밭에 인민군들의 중대본부가 있었고, 예하 부대가 해안에 배치되어 있었다. 벼락재
경주김씨묘지위에는포를설치하려고구덩이도팠는데,포를설치하지는못했다.그리고
해안을따라호를팠다.라인균님도아버지대신호작업을하였다.
6.25당시무창포에서미군포로를보았다.
라인균 님은 6.25당시 무창포에서 미군포로를 보았다. 당시 석대섬 밖 먼 바다에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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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줄줄이 이어져 북상하고 있었다. 북상하는 모습이 육안으로도 보이고 소리도 났다. 어
느날저녁,총소리가요란하게났고,다음날석대섬에서미군을데려왔다.저녁에미군보
트가 몇 대 들어왔다가 인민군들의 사격을 받아 1명이 죽고, 1명이 석대섬에 은신하다가
포로가 된 것이었다. 죽은 미군은 현재 비체팰리스 근처 장벌에 묻었는데, 나중에 미군들
이 수습해 갔고, 생존한 미군은 보트와 함께 무창포 아래뜸 술집으로 데리고 왔다. 석대
목을통하여걸어서왔다.당시보트를대놓은곳은현재제1주차장,초원슈퍼앞이었다.
인민군들은 미군을 방에 감금하고, 마루에서는 미군의 기관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
며,어떤인민군은자기가미군을쏘아죽인다고나서기도하였다.이때포로된미군은한
국말로 “죽이질랑 허지마”라고 애원하였다. 이때 말한 “죽이질랑 허지마”라는 말은 무창
포아이들의유행어가되었다.당시무창포에있던인민군들은영어를할줄몰랐다.
포로로잡힌미군들은수심을재러왔다고하였고,이후각굴을통하여남포에있는상
급부대로이송되었다.당시남포면양기리턱굴마을에인민군들의상급부대가있었다.
17)
무창포에서는자염도만들었다.
17)면담자가미군포로의이송을추적해보았다.양기리현재의월전초등학교근처에서끌려가는미군을보았다는
증언을들었으나,이후의행적은조사가불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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